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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자발적인 참여의 힘

by 격암(강국진) 2021. 7. 13.

21.7.13

오늘날 세계에는 하나의 커다란 오해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 세계는 이미 문화의 시대로 접어든지가 오래인데 많은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여전히 봉건적이고 무력을 겨루는 전쟁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소프트 파워라는 말이 유행한지도 오래이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하드 파워 중심으로 사고하고 소프트 파워가 세상의 중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오해는 도덕적인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바보같은 짓이다. 따라서 이 오해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는 사회가 세계를 문화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리드하게 될 것이다. 시대를 움직이는 진정한 힘을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사회가 리더가 될 수는 없다. 

 

문화의 방식과 무력의 방식의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문화의 시대에는 무력사용은 배제되고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무력의 시대에는 강압에 의해서 상대방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금의 시대가 무력의 시대가 아니고 문화의 시대라는 것은 오늘날 강압력이란 것이 별로 효율적인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정말 그럴까? 사실 적어도 한국에 경제제재를 해서 굴복을 받아내려고 했던 일본 정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제와 정치는 따로 라는 원칙을 포기하고 정치 사회적으로 불화가 생기자 그것을 경제전쟁으로 만들었다. 한국이 그 경제전쟁을 이긴 것은 한국이 가진 힘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대 시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더 큰 나라는 더 작은 나라를 강압할 수 있다고 믿는 일본 정부의 어리석음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날 경제전쟁은 매우 제한적이다. 경제적 소통은 모든 나라가 모든 나라와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 공격의 힘을 치명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만 상대를 공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모든 나라의 단합된 합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본에는 명분이 없었고 한국은 이미 세계에서 너무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 한국은 이란이나 북한처럼 세계 경제에서 떼어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며 그런 나라들 조차도 경제재제는 한 나라가 하는게 아니라 국제기구의 합의를 통해서 하게 된다. 정경분리라는 원칙을 깨고 한국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반도체 공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공격을 하는 일본이 어떻게 그 경제전쟁을 이길 수가 있었겠는가. 설사 한국이 불화수소같은 것을 자체개발하지 못했다고 해도 세계적으로 반도체 수급 문제가 생겼으면 일본은 큰 비난과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공감을 얻어내기 힘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안에 있는 보편적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걸 위해 약간 이야기를 바꿔서 직장 이야기를 해보자. 예전에는 한국에서 마초적 리더쉽이 통했다. 호형호제하면서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상명하복의 군대식 리더쉽 말이다. 그런 시대에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압력을 가하기가 너무 쉬웠다. 즉 나를 보호해줄 강자가 없으면 약자는 강자에게 부당한 행위를 당해도 호소할 방법도 없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이런 시대에는 직급과 상관없는 보호자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 보호자에게 절대 충성할 필요도 더 강했다. 이걸 소위 '라인을 탄다'고 한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낡은 마초적 리더는 통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따라오지도 않고 고소당하기 딱 좋다. 오늘날에는 강압력을 발휘하지 않으면서도 명분과 여론을 장악하고 이익으로 유혹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대기업도 몇명의 노동자에게 걸려서 고생할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예전과는 크게 다르다. 그래서 여성적인 리더쉽이 부각된 것이다. 

 

이런 직장문화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강대국도 명분과 여론이 필요하다. 하나의 국가가 어느 이상의 힘을 가지면 강대국도 단독으로 그 나라를 억압하기 어렵다. 한국이 그걸 잘보여준다. 미국이나 중국은 경제규모로 세계의 G2라고 불리지만 한국의 경제 문화 군사력이 어느 이상으로 성장하자 강압의 정책을 포기하기 시작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을 압박해서 한중관계가 가까워지면 미국에게는 크게 불리해 지고 중국을 제재하는 효과가 떨어진다. 중국이 한국을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중국 전체를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가지게 되면 그런 미사일 능력은 실질적으로 미군 미사일을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보여주고 중국은 한국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써야 하므로 미국과의 군사경쟁에도 제한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게 기분 나쁘다고 중국이 한국에게 가할 수 있는 공격이래야 이미 써버린 한한령정도다. 우리는 이미 그 경제공격을 버텨냈고 중국은 더 쓸 카드가 없다. 중국은 물론 한국보다 더 큰 나라지만 한국과 전면전을 할 수는 없다. 중국도 한국과 대립각만을 세우다가는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중국은 호주와의 경제전쟁도 승리하지 못했다. 강압의 힘은 제한적이다. 

 

문화의 힘이 가지는 경쟁력은 강압의 힘이 가진 약점에서 나온다. 우리가 축구나 야구같은 경기를 이기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심판을 매수하면 되는가? 상대편에게 온갖 협박과 반칙을 하면되는가? 물론 이것은 윤리를 따지기 전에 어리석은 생각이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경기들이라면 매수된 심판의 문제는 단순히 한 경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의 압력을 받는다. 따라서 이런 방식은 통하지 않으며 설사 통한다고 해도 효율이 좋지 않다. 따라서 경기는 기본적으로 게임의 법칙을 어기지 않는 방법으로 이길 수 밖에 없다.

 

하드파워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게 있다. 그들은 규모에만 집중하고 분쟁과 알력의 당사자들에게만 집중하며 법과 합의를 우습게 여기고 여론이나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시민집단같은 군중의 힘을 무시한다. 그러니까 일개 사원은 재벌을 이길 수 없고 작은 나라는 강대국에게 무조건 진다고만 생각하며 살아남는 방법은 '어느 라인을 타는가'를 결정한뒤 어느 나라, 어느 사람에게 절대복종하는 거라고만 생각한다. 게임의 법칙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며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생각을 맹신한다. 

 

우리가 만약 강압의 힘이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졌다고 믿는다면 그건 순진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이나 일본의 거대한 덩치를 보고 있으면 경제적 규모가 많이 성장했다는 지금도 그들의 절반도 안되는 한국이 그들과 다툴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뒤집어 말하면 그래서 강대국의 시민들은 이런 사고방식에 빠지기 쉽다. 큰 땅과 인구를 가진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이 더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같은 나라를 강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착각은 심지어 많은 한국인들도 한다. 하지만 일은 이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한국은 물론 미국 중국 일본과 비교해 작은 나라지만 그런 강압이 통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의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한국도 명분과 여론의 힘을 빌리면 승리를 위해 총량적으로 중국 일본보다 더 커질 필요가 없다. 거대 제국이 경쟁력을 가지는 시대는 끝나간다. 이미 끝난게 아니라면 말이다. 

 

경기에 이기고 싶다면 게임의 법칙을 어기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강압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자발적으로 조직된 사람들의 힘이다. 우리는 이미 조선시대 이래로 의병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의병운운하면 웃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건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건 굉장히 의미심장한 사실이고 의병은 지금의 시대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그걸 웃는 사람들은 시대를 쫒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촛불시위로 정권이 바뀌어도 누군가가 돈과 조직을 대서 그걸 만들었다고만 생각한다. 그들은 한류팬들이 정치 사회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말을 들어도 그걸 그저 사소한 것으로만 여긴다. 마이클 잭슨의 팬들은 한국에서 모여서 민주화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BTS의 팬들은 트럼프 반대운동을 하기도 한다. 이 차이는 의병의 전통을 가진 한국의 문화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게 정말 사소한 것일까? 혹시 당신은 낡은 패러다임의 사고방식에서 빠져오지 못해서 의병의 의미를 우습게 여기고 있는거 아닐까? 

 

일본과의 경제전쟁을 다시 생각해 보자. 한국인들의 행동은 현명했다. 일본은 국가적인 대항으로 나왔지만 한국은 마치 임진왜란때의 의병들처럼 주로 시민행동으로 대응했다. 노재팬운동을 벌이고 이것은 기업들에게도 압력으로 작동할 수 밖에 없었다. 시민대응은 명분상 훨씬 훌룡하다. 자발적인 조직에 의한 시민의 대응은 엄청난 무기가 된다. 예를 들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일본대중이 한국인들의 행동이 마음에 안든다며 자발적으로 큰 사회적 운동을 벌였다면 그것에 대해 한국정부가 어떤 대응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미얀마 군부에 대해 한국 정부가 아무 것도 안하더라도 한국 시민들이 반군부단체에게 돈을 기부하는 것은 한국이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행위가 된다. 이걸 한국 정부가 직접 개입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보라. 현대 사회에서는 무력 전쟁과 경제 전쟁은 모두 매우 제한적이다. 그런 것에 의존하자는 생각은 앞에서 말한대로 심판을 매수해서 경기를 이기자는 생각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이상 실력이 커지면 비록 상대가 약자라고 해도 우리는 강압에 의해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 게임의 법칙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국방력은 중요한 것이지만 어느 이상으로 커지면 수익성이 없다. 돈만 잔뜩 들뿐 그걸로 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미국도 더이상 세계의 경찰을 안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게임의 법칙이, 시스템이 안정화되었을 때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발적으로 조직된 사람들의 힘이다.  시스템은 그걸 막을 명분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강압력에 의해 그걸 날려버릴 수 있다고 믿지만 세상은 점점 더 그것이 불가능한 곳으로 변하고 있다. 한일간의 경제전은 어떤 의미에서 일본 정부와 조직된 한국 시민들간의 전쟁이었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간의 싸움이었다. 일본이 이 경제전쟁에서 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시민의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이유는 명분과 합리적 판단을 하는 시민이 일본에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만약 강압의 힘이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졌다고 믿는다면 그건 순진한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 너무 빠지면 곤란하다. 상대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이상 중요한 존재가 되고나면 이미 강압은 통하기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강압의 논리에 매달리는 쪽은 문화의 논리, 설득력의 논리, 자발적 참여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이나 집단의 먹이가 되고 만다. 나는 한국에도 여전히 강압의 논리에 중독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이 세계를 리드할 미래가 그리 멀지 않다고도 느낀다. 한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민주적이고 자발적 참여에 익숙하다. 촛불혁명은 한국이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미국이 중국을 제압하지 못했던 이유도 상당부분 여기에 있다. 오늘날의 미국은 문화적 힘이 떨어졌다. 소프트 파워가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미국 사회를 그들이 가지고 싶은 이상사회로 여기지도 않을 뿐더라 미국 시민 사회가 스스로 움직여서 중국과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들은 고작해야 아시아 사람에 대한 차별적 언동이나 보여줄 뿐이다. 그런 쪽으로 상징적인 인물이 트럼프였고 따라서 트럼프가 공격하는 중국과의 싸움은 강압대 강압의 싸움일 뿐이었다. 중국은 물론 무시해도 좋을 약자가 아니고 트럼프는 세계 모두를 향해 협박을 늘어놓는 인물이었으므로 중국이 살아남을 길은 많았다. 이제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이런 문제가 많이 개선되었다. 따라서 중국은 더 심각한 위협을 느끼게 될 수 밖에 없다. 권위주의적 집단인 중국을 죽일 수 있는 무기는 강압이 아니라 문화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을 죽일 수 있는 것은 한국 뿐이라고 쓴 적이 있다. 미국의 부족해진 소프트파워를 채워줄 존재가 지금의 세계에서는 한국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중국에게 부담감을 주겠지만 치명타를 줄 부분은 문화다. 지난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바이든은 문재인 한국대통령이 백신을 많이 생산해서 전세계 백신부족문제를 해결하자고 말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정책이다. 작게 보면 한국이 백신허브가 되어 경제적 방역적 이득을 볼 수 있는 정책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민주진영의 도덕적 우위를 다져서 세계의 여론을 민주주의 쪽으로 끌고 오자고 하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경제를 포기하고서라도 백신을 공급하는 나라들이 명분과 여론을 잡지 않겠는가? 그것이 중국을 압박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작은 예일 뿐이다.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민주주의 문화를 퍼뜨리는 한국인들이 더 많아질 수록 중국은 자신의 권위주의적 독재적 본성을 명백히 하면서 한국을 골치아픈 존재로 여기게되고 그들이 작은 한국에게 형편없이 패배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강하다. 나는 그게 한국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한국 사람들 중에도 다수의 사람들이 내가 이 글에서 적은 강압의 논리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낡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영원히 다시는 한국에서 주류가 될 수 없을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한국이 이 참여하는 시민의 힘으로 영광과 번영의 시대를 살게 될 것이며 그런 미래가 불과 5년 10년앞에 있다고 믿는다. 한국 주가가 일만포인트를 달성하고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고 대한민국이 세계의 거인으로 서는 시대가 우리의 앞에 있다. 우리는 이미 당첨된 복권을 손에 들고 있다. 그걸 찟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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