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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BTS와 21세기

by 격암(강국진) 2021. 7. 22.

BTS가 6주연속 빌보드 1위를 한 끝에 자신의 신곡 퍼미션투댄스로 빌보드 1등을 갈아치웠다. 이밖에도 BTS는 지금 5곡 연속으로 빌보드 1위곡을 내고 있는데 이는 마이클 잭슨 이래 33년만의 기록이라고 한다. 기록은 계속 갱신되고 있으니 어쩌면 BTS는 기록상으로 마이클 잭슨을 넘어서는 가수가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섯불리 BTS가 누구보다 위대하다던가 BTS의 곡이 음악역사상 가장 뛰어난 곡들이라는 식의 해석을 내놓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다른 시대, 다른 미디어 환경속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BTS가 훌룡하다는 것 이상의 해석이 필요하며, BTS가 어떤 희귀한 일탈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현상인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없을 경우 우리는 BTS를 만들어 낸 이 세계도, 그리고 BTS가 만들어 내고 있는 이 세계속의 변화도 보지 못할 것이다. 

 

말했듯이 그 이유가 뭐건간에 이미 BTS의 존재감은 마이클 잭슨과 비견될 정도로 커졌다. BTS와 마이클 잭슨은 사실 인종차별을 넘어선 가수라는 점에서 굉장히 역사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기도 하다. 흑인 가수가 그렇게도 많은 미국이지만 마이클 잭슨 이전에는 흑인 가수에 대한 차별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영웅이 된 흑인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다. 마이클 잭슨의 인기는 너무나 대단했으며 따라서 백인이 주류를 이루던 문화계의 기득권층도 흑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문에 후일 인기를 얻은 휘트니 휴스턴 같은 가수는 마이클 잭슨같은 가수에게 고마음을 느꼈는데 마이클이 없었다면 그 이후의 흑인들은 여전히 부당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적 시각은 21세기까지도 이어졌다. 한류 열풍전에는 일본 문화의 인기도 있었고 홍콩과 대만중심의 중국 영화도 있었지만 일본과 중국은 결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의 벽을 깨지 못했다. 오히려 선입견을 더 깊어지게 만들었다. 중국 영화인으로 아주 유명한 재키찬 즉 성룡도 웃기는 남자일 뿐이고 몸을 쓰는 무도인일 뿐이었다. 일본은 그 문화적 인기가 최절정에 있을 때 조차 엄숙함이 지나쳐 약간 희극적으로 보이는 사무라이 같은 남성상이나 만들었다. 일본인은 스스로를 아시아인이 아니라 유럽인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백인모습을 가진 주인공들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때문에 많은 유럽인들은 지부리의 애니메이션이 유럽인이 만든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이제 BTS가 나왔다. BTS는 동양인을 위한 마이클 잭슨이 되고 있다. 그들을 한사코 무시하고, 한사코 예외적인 사건으로 보려고 하던 미국이나 유럽의 기득권층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물론 돈의 문제도 된다. 미국의 기획사들이 자기 가수가 BTS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도, 모두와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BTS는 어떻게 성공했는가? 왜 BTS가 이토록이나 불리한 상황에서 싸우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 그룹을 이길 수가 없는가. 마이클 잭슨이 나왔으므로 휘트니 휴스턴이 나오듯이 이제 BTS가 나왔으므로 또다른 아시아 슈퍼스타의 출현은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보인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계속 무시하는 사람들은 사라질 뿐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BTS가 승리하는 이유를 한가지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BTS의 음악이 다르고 그들의 재능도 다르다.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에 잘 적응한 것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재능있는 사람들은 세계 어디나 있다. 게다가 유튜브 같은 것을 활용하는 방식도 무슨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것만으로 BTS의 성공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요소들과 연결되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 것들보다 오히려 더욱 두드려져 보이는 것은 팬공동체, 팬덤이다. 본격적인 BTS의 팬이 된다는 것은 BTS를 좋아한다는 것 이외에 팬덤안에서 어떤 공동체적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팬들끼리 감정을 나누고, 집단 행동을 하고 상품을 만들고 교환하는 것이다. 팬덤이 하나의 공동체로 존재하여 지속된다는것은 누구나 바라는 환상적인 상황이다. 그 지속성때문에 이미 빌보드 1위곡을 만들만큼 BTS 팬덤이 확장되었다면 우리는 앞으로 당분간 BTS의 인기는 계속 될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팬공동체가 그토록 좋은 거라면 다른 나라의 기획사들은 그걸 왜 안만들까?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게 바로 한국의 문화적 특성인 것같다. 서양인들은 아미에 가입할 수 있지만 서양가수가 서양팬들을 가지고 아미같은 것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너무 어려워 보인다. 역시 문제는 문화다. 적어도 예술문화 부분에 있어서 한국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멋진 균형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면 서구 문화는 개인주의를 훨씬 강조하고 일본 문화는 집단주의가 너무 세다.

 

집단주의가 아주 강한 팬과 연예인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은 일본의 아이돌들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일본의 아이돌들은 종종 팬의 노예나 장난감같다. 그런데 팬에게 끌려가서 장난감이나 노예가 되어버린 연예인들은 확장성이 없다. 팬의 요구를 들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집중하므로 연예인이 노래도 춤도 외모도 별로다. 그러니까 팬덤이 클 수가 없고 특히 국제적인 확장성을 가지는데 있어 한계가 있다. 

 

개인주의가 아주 강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에게만 너무 관심이 집중되어져 있다. 그런 집단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최대한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들 듣지는 않고 자기를 표현하는데만 집중하는 것이다. 물론 연예인은 압도적으로 큰 스피커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고 자본의 후원을 가지고 있기에 연예인이 되었다. 그 결과 개인주의적 사회에서의 연예인 팬덤은 팬이 연예인의 노예같은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마치 계시를 받은 성직자가 메세지를 전하면 그걸 받아들이는 신도들처럼 유명한 가수는 팬덤을 지배한다. 메세지는 물론 가수에게서 팬덤으로 일방적으로 흐른다. 

 

BTS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불가능해 보이는 균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BTS는 팬과 소통한다. BTS는 물론 자기 목소리를 내지만 그냥 내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듣는 사람도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RM같은 사람은 우리를 이용해서 행복해지세요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일본식의 집단주의같다. 그러나 만약 그런 거라면 BTS는 국제적인 인기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BTS는 소통하지만 자기를 지킨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는 식의 개인주의도 아니고 남에게 빠져서 자기를 잊는 집단주의도 아니다.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지만 여전히 나는 내 인생을 살뿐이라는 태도를 유지하는 균형을 지키고 있다. 나는 내 말을 하지만 나는 당신의 말을 듣기도 한다는 태도를 취한다. 주목할 것은 이것이 단순히 BTS의 능력만으로 되는게 아니라 팬덤 스스로의 자정력에도 의지한다는 것이다. 

 

BTS의 팬들은 BTS가 진실하다고 느낀다. 그들은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힘들지 않으면 힘들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노래는 노래일 뿐이다. 부자이고 유명한 BTS가 배가 고파라던가, 나도 유명해지고 싶어같은 메세지를 보내는 노래를 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다. 하지만 BTS는 그런 식으로 노래부르지 않는다. 정상에 오른 최근에는 BTS의 존재의미를 고민하면서 세계인들에게 우리 힘내자는 메세지를 보내는 노래를 연달아 발표하고 있다. 이런 노래는 누구나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부른다면 공감하지 않을 것이다. 아미들은 BTS가 그런 메세지를 보내면 진심이라고 믿고 감동한다. 그러므로 BTS 노래의 인기는 단순하게 노래만 떼어내서 평가할 수 없다. 마치 대화중의 한마디 말을 앞뒤 문맥없이 떼어내서 평가하는 것이 의미가 별로 없듯이 말이다. BTS 노래의 본질은 BTS와 아미간의 대화와 소통이다. 

 

이러한 BTS와 팬덤간의 관계는 단순히 연예계 동향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소통은 21세기의 큰 화두다. 예를 들어 21세기는 어떤 기업가가 성공하고, 어떤 정치가가 성공할 것인가. 여기서도 소통은 이미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스티브 잡스이래 기업에서도 생태계라는 말을 쓰고 있다. 기업이 단순히 상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고 소비자의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 기업이 소비자의 요구에 귀기울이고 소비자가 때로는 돈을 버는 생산자가 되기도 하는 그런 문화를 만드는 것을  우리는 생태계라고 부른다. 그래서 애플은 앱시장을 열었고 스티브 잡스같은 얼굴을 내세워 소비자와 소통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은 애플제품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BTS 이야기와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나는 한국의 촛불집회는 생태계의 힘을 정치권에서 보여준 좋은 예라고 믿는다. 중심이 따로 없는 이 일련의 집회들은 대중의 뛰어난 수준이 대화에 중요한 역활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탄핵시위에 엄청난 사람이 참가했음에도 그 대중은 비폭력을 유지할 정도로 자제심을 발휘했다. 그런 집단적 자제심이 작동할 때 우리는 BTS의 예에서 말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놀라운 균형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결코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듣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하나의 집단으로 힘을 발휘한다. 이 상호충돌하는 것같은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될 때 큰 힘이 발휘된다. 정권의 교체나 세계적 스타의 탄생같은 거 말이다. 

 

결국 모든 사회적 분야에서 우리는 같은 현상을 보게 될 것이다. 빠른 피드백을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의 발달, 소통의 중요함 그리고 공동체의 탄생과 성장. 이걸 잘해내는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예를 통해 지적되었듯이 이 일들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매우 어렵다.

 

일단 그 분야를 지배하는 문화적 관행이 그걸 막는다. BTS를 배출한 한국이 한국의 일론 머스크나 스티브 잡스를 아직 배출하지 못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적 관행과 기득권의 반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반대로 말하면 스티브 잡스를 배출한 미국이 BTS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대중의 수준 이야기로 해석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한국 대중의 문화적 예술적 수준은 BTS를 배출할 능력에 도달했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해석이다. 사실 한국 대중은 아직도 경제라면 저금아니면 부동산밖에 모른다. 기업이나 투자가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이미 한국 주식시장이 소액 투자자들의 많은 참여를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머지 않아 한국 경제의 새로운 중심이 될 사람의 탄생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소통은 물론 빠른 피드백이 가능해져야 활성화된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피드백의 속력을 결정하는 사회적 인프라가 어떻게 발달하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경제나 정치적인 발달은 물론 BTS 현상을 이해하는 것에도 의미를 가질 것이다. 확실히 BTS는 인터넷 미디어가 낳은 스타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인이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소통에 참여하는가, 어떤 경제인이 그렇게 하고 있는가, 어떤 학자가 그렇게 할 것이고 어떤 엔지니어가 그렇게 할 것인가. 

 

미래로 가는 문은 하나둘씩 열리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소통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화적 개방성, 대중의 뛰어난 자질 그리고 빠른 피드백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인프라는 이미 중요해졌지만 앞으로는 더 중요해 질 것이다. BTS가 한국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은 한국이 그 미래로 가는 문에 아주 가까운 나라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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