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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한글의 혁명

by 격암(강국진) 2021. 10. 9.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1443년 거의 6백년전에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셨습니다. 그리고 1446년 그것을 반포하셨는데 한글날은 반포일에 맞춘 기념일이고 북한에서는 창제일에 맞춘 기념일을 가진다고 합니다. 한글의 위대함은 지금 전세계에서 쓰이고 있는 문자중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서 널리 쓰이고 있는 유일한 문자체계라는 사실에서 이미 두드러집니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약간 변형이 있기는 하지만 수천년전에 만들어 진 글자들을 쓰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6백년된 첨단 문자를 쓰고 있는 셈입니다.

 

히라가나를 쓰는 일본도 비교적 새로운 글자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그 글자들은 애초에 한문을 변형시켜 만든 것인데다가 표음문자라기에는 한글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부실합니다. 히라가나 50자에다가 카다카나 50자 모두 백자나 되는 글자를 가진 일본은 그걸로도 소통이 되지 않아 한문까지 씁니다. 저는 중국에 살아본 적은 없으나 10년간 일본에 살았기 때문에 한자를 쓰는 문화가 얼마나 사람들의 정신을 억압하는가를 많이 느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 글의 문맥상 하지 않겠으나 저는 한자때문에 중국과 일본은 결코 서양의 민주주의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이 성장하는 어린 시절에 정보가 제약되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에 익숙해지는 거죠. 

 

그 서양은 알파벳을 씁니다. 이것은 한문에 비하면 훨씬 대중적인 글자이지만 오래전에 만들어진 때문인지 문제가 많습니다. 같은 발음을 다른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같은 알파벳이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발음이 됩니다. ACE는 에이스죠. ICE는 아이스입니다. 보통 A는 아로 I는 이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유명한 고대 로마의 황제 시저는 Caesar로 쓰고 카이사르라고 읽는게 아니라 시저라고 읽습니다. 이때문에 미국에서는 저학년 학생들이 스펠라톤같은 맞춤법 경쟁시합을 합니다. 한국에서도 맞춤법을 외우고 익혀야 하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맞춤법을 틀리기는 합니다만 영어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수준입니다. 한국의 맞춤법은 사실 틀려도 의미전달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영어는 그냥 발음대로 마구 쓰면 아예 이해불가의 글이 됩니다.

물론 도구만 좋다고 좋은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듯 한글이 우수해도 그걸 잘 써야 훌룡한 언어문화가 만들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수백 수천년에 걸처 알파벳을 가지고, 한자를 가지고, 히라가나를 가지고 각자의 언어문화를 만들어 온 다른 나라를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고 나쁜 것도 어떤 면을 보냐에 따라 다른 것이죠. 한자는 배우기 어렵고 표현이 제한되지만 그대신 아주 멋진 시를 쓸 수 있는 문자이기도 합니다. 문학에서는 같은 표현이 여러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중의적인 면이 중요한데 한자가 그런 역할을 잘하죠. 뒤집어 말하면 물론 뜻이 애매한 문자라는 말이 되지만 당시같은 것을 한글로 번역한다면 아무래도 한문으로 보는 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좋은 도구인 한글도 잘 써야 거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좋은 한글이 진짜 훌룡하게 꽃피우는 것은 지금부터인 것같습니다. 만들어진지는 6백년이나 되었지만 사실 지금도 전문가들이 쓰는 전문영역으로 가면 한자말 투성이인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쓰는 많은 말들이 외국에서 들어오면서 일본에 의해 한자어로 번역된 말이라고도 들었습니다. 신경, 철학같은 말들도 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코노미가 왜 경제냐고 하면 일본 번역가들이 과거에 경제라고 썼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 말은 장자가 한 경세제민()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게 한문이 있는지 없는지도 신경 안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의 단어가 사회적으로 가지는 의미나 선입견에는 그 역사적 어원이 영향을 미칩니다. 그걸 쓰는 사람이 그걸 몰라도 말이죠. 우리는 생각을 해서 단어를 선택하고 그걸 쓰지만 그 생각이라는 것도 언어가 없으면 되질 않는 것이라서 거꾸로 단어들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면도 아주 크니까요. 경제는 원래 이런 거 아냐, 철학은 원래 이런 거 아냐, 과학은 이런 걸 원래 과학이라고 하잖아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저는 현대인을 사이보그 1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이는 인간에게는 동물적 본능이 있고 그 본능의 위를 문명이 살짝 덮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의식을 말하는 프로이트 같은 사람이 하는 말과 통하는 말이죠.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덮고 있는 그 문명이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어로 짜여진 정보들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했고 교육과정을 통해 이 문명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집어넣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죠. 인간은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 지니까요. 

 

그런데 한글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이 소프트웨어가 말하자면 상당부분 문자의 힘에 의존한다는 겁니다. 한글로 소설을 쓰건 한자로 소설을 쓰건 소설은 쓸 수 있지만 그 소설의 내용에는 문자가 나아가 언어가 영향을 주게 될 수 밖에 없죠. 이렇게 말하면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다른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다른 종류의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한글을 써서 언어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사실은 한국인의 정신 그 자체를 새로 만들어 왔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6백년전에 시작된 한글 혁명은 이제 시작이며 이제 열매가 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숫자는 한국만 치면 겨우 5천만명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문화적 힘은 몇억의 인구를 가진 외국을 능가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사람들은 묻겠죠. 한국은 뭐가 달랐을까? 그 답은 물론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를 하나만 들라고 한다면 그건 어쩌면 한글일 수 있습니다. 가장 민주적이고 대중적이며 디지털 사회에 어울리는 첨단 글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이기에  새시대에 걸맞는 정신을 길러낼 수 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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