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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새로운 인간의 발견과 한류

by 격암(강국진)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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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0

나는 누구인가라던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행동과 선택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질문이며 따라서 경제적 정치적 기술적 변화로 인해 세상이 변할 때 거듭해서 제기되고 다시 답해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정체성의 재정립 혹은 인간의 재발견은 새 시대의 필연적 과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근대국가가 출현하고 봉건제가 물러가고 공화정이 보편화되기 시작할 때 세계는 개인이라던가 시민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적 지배가 주도적이었을 때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개개인의 욕망과 감정은 그리 자세히 살필 것이 없는 것이었지만 일반시민이 힘을 얻는 시대에는 우리는 개인을 세세히 살피며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고 심지어 개인을 신성화할 필요가 있었다. 진리는 우리 개인의 내부속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배운 것, 성별, 재산과 상관없이 1인 1표를 행사하는 투표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본주의이고 낭만주의다. 낭만주의의 뿌리를 쓴 이사야 벌린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서구의 19세기에 있었던 것이지만 우리는 그 후손으로 낭만주의는 우리 안에 살아있다. 오늘날 진리의 보편성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꿈을 쫒으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는 삶을 찬양하는 메세지가 세상에 가득한 것은 바로 이 낭만주의가 만들어 낸 결과다.

 

이 모든 것들은 보편적 지식이 증대되고 거대한 정치구조가 나타남에 따라 강해진 보편성의 힘에 저항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로보트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정해진 메뉴얼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면 우리는 마치 잠잘 때 숨은 쉬지만 의식이 없는 것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잠에 빠져들어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없이 살게 될 것이다. 옳고 그름이 보편적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모든 사람에게 같은 답을 가지지 않겠는가?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의 말에 적게 알고 있는 사람은 복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적 논리나 객관적 논리가 파고들지 못하는 개인이라는 성역을 설정해 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대선후보를 선택할 수있다. 그것에 대해 누군가가 설사 객관적으로 설득력있는 답을 제시하지 못해도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왜냐면 개개인의 선택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하다. 왜냐면 세계는 이미 20세기를 지나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한때 새로운 시대였던 세계는 이제 지루하고 낡은 시대가 되었다. 통신과 컴퓨터의 발달로 우리는 전보다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다루고 그것을 새로운 미디어로 소통하고 저장한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르네상스가 필요하고 새로운 낭만주의가 필요하며 인간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오늘날 복잡해진 세상은 훨씬 더 많이 계층화되고 파편화되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은 각자만의 토끼굴 속에서 자기의 세상을 만들고 바라보고 산다. 누군가가 전체 사회를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강한 폭력이다. 그것은 남자가 이렇다라던가, 일본인이 이렇다라는 식으로 일반명사를 통해서 하는 말들이 다양성이 많은 세상에서 폭력인 것과 같은 이유다. 남자가 이렇다니, 대체 어떤 남자가 그렇다는 것인가?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렇게 쉽게 서로에게 딱지를 붙이고 선입견을 적용시킬 때 모순은 빠르게 누적된다. 정치적 싸움은 격화되고 단어의 본질을 둘러싼 무의미한 싸움은 불합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사람들이 계속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는 사실 그리고 세상이 계층화되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우리는 오늘날 점점 더 인기를 얻어가고 있는 한류를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다. 한류의 성공은 물론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져 온 한국의 문화적 특징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이라는 사회가 지구상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기술문화가 잘 발달된 곳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즉 한국이 미래 사회의 문화를 선도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것에 지친 보수적 서구인들조차 그것을 참신하게 느끼는 것이다.

 

한국의 음악과 영상은 모두 복합적 장르라던가 장르파괴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일단 음악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서태지를 거치고 소녀시대를 지나며 한국의 음악은 마치 그 자체가 하나의 앨범을 듣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여러 장르의 음악이 한 곡속에서 나오는 일이 많다졌다. 소녀시대의 I got a boy는 이런 점을 잘 보여주는 노래로 이 노래를 듣고 반응을 올리는 서양사람들을 보면 이거 미친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정도로 그들은 이런 장르파괴를 재미있어 하면서도 소화를 못하고 낯설어 한다. 물론 BTS의 노래나 블랙핑크의 노래도 이런 점들이 있다.

 

그럼 서구 음악은 어떤가? 그들은 음악은 개인을 강조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하나의 영감으로 내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하나의 단일한 이야기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하나의 인간, 하나의 감정을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 서구팝음악은 최근들어 오히려 더 단순해졌다고 한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지만 그덕분에 그런 음악을 듣다가 최근의 한국 음악을 들으면 우리는 서구 음악이 좀 심심하고 단조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영화도 장르파괴적이다. 코미디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적 비판과 흔한 신파가 장면이 바뀔 때마다 번갈아 나온다. 그래서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상을 받았을 때도 미국평론가들은 그 영화를 장르파괴적이라고 했다. 서구에서 로맨스 영화를 보면 그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로맨스고 코미디 영화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다. 미국 코미디를 보다가 좀 진지한 것같은 장면이 나와서 거기에 몰입했다가는 배신당하기 일수다. 이러한 점은 대개 미국의 음악도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국음악과 영화가 단순히 여러장르를 섞은 것이라서 인기가 있으며 따라서 별거아니라고 오해를 해서는 안된다. 레고블럭으로 예쁜 성을 만들었는데 누가 그걸 보고 나는 대신에 모래나 쌀알같이 레고블럭의 제한이 없는 재료로 성을 만들겠다고만 결심하면 과연 더 좋은 성을 만들 수 있을까? 형식은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시를 지을 때 형식이 있다면 그 형식은 무의미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형식을 지킬 때 오히려 좋은 시를 짓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이든 영화든 단순히 장르적 형식을 파괴하는것으로는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대개 쓰레기가 나온다.

 

한국의 장르파괴가 성공적인 이유를 제대로 쓰는 것은 음악과 영화를 전공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나마도 사실은 좀 더 후대가 되어 한국의 그것이 새로운 장르가 되어야 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일반인인 나로서는 그저 좋다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냥 좋은 것은 아니다. 랩을 하다가 디스코로 전환되고 다시 레게음악을 한다고 무조건 좋은 음악이 나올리가 없다. 오히려 그 전환이 불필요한 방종이 아니라 원하는 컨텐츠를 전달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일 때만 좋은 음악, 좋은 영화가 나올 것이다.

 

나는 우리가 아직 정형화하기 어려운 한류의 이 어떤 점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인간상이라고 믿는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가고 있는 길이 초정보화사회를 선도하고 있는 길이라면 그렇게 발견되는 새로운 인간상은 세계적 표준이 될 수 있다. 다른 사회도 그리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한류인기의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상품을 몇개 판다거나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문제가 아니라 서구가 르네상스를 거치며 쌓아올린 인본주의적 전통을 한국이 이어받아 미래로 이어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에서 생겨나는 이유는 한국이 기술문화적으로 선도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가장 인터넷이 빠르고, 가장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으며 가장 진취적인 시민들이기 때문에 새시대를 향해 뛰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세계적 보편을 새로 세우는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서구의 영웅주의와 개인주의는 실패하고 있다. 개인을 신성시하는 그들이 만들어 내는 대중적 영웅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자기만을 과다하게 강조하는 것때문에 그들은 마약에, 성적 문란에, 사치에 찌든 모습일 때가 흔하다. BTS 때문에 들여다본 빌보드의 노래들과 스타들은 종종 그렇다. 그들은 겸손이 없고 자기 절제가 없다. 하나의 자아가 하나의 이야기속에 홀로 존재해서 신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서구음악은 소위 록스타의 생활이라고 하면 떠올려지는 그런 태도를 낳았다. 이런 생활과 음악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매력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미친 소리가 된다. 다시 말해 근사하지만 편협한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보편성이 없다. 서구의 음악 스타중에 자기 음악을 자기 자식에게 권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왜 서양부모가 한국예절을 가르치는 태권도나 깨끗한 이미지의 BTS를 자식에게 권할까?

 

BTS같은 보이그룹이 오랜 시간 훈련을 받아 만들어 지는 것에 대해 서구에서 공장에서 만들어진 스타라는 비판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하이브의 방시혁은 서구의 오페라나 발레단에서 오랜 기간 훈련을 하고 그를 통해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시 하면서 팝음악이라고 어느날 갑자기 훈련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게 1960년대 록의 정신이었다. 기타코드도 몇개 모르거나 무대에 서본적도 없으면서 어느날 마구 음악을 하다가 영웅이 되는 타고난 록스타들 말이다. 그리고 그들 다수는 일찍 죽거나 팀을 해산했다. 이런 록스타와 BTS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겸손하고 그들의 성취가 훈련의 결과라는 것 그리고 협동의 결과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매우 절제된 삶을 산다.

 

우리가 발견하고 구체화시킬 새로운 인간상이란게 뭔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한류는 그 인간이라는 것이 서로 연결되고 다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표현한다. 옳고 그름은 하나의 패러다임 혹은 하나의 경계선 내부에서만 정확히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축구에서 옳은 것이 농구에서 옳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다양성이 크게 늘어난 현대사회는 여러개의 다른 패러다임이 아주 느슨하게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다. 그래서 옳고 그름이 엄밀하게 보편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이러한 다양성과 서로다름은 때로 절망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조화롭게 배치될 수 있는 예를 문화컨텐츠로 보여주는 한국음악과 영화는 그것이 흥미로운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우리가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희망을 준다. 우리는 여러개의 게임을 동시에 하는 다면체이며 여러 정체성을 가진 존재다. 마치 한국 뮤직비디오에서 장면마다 옷이 달라지는 스타들처럼 말이다.

 

한류는 협동과 연결을 강조한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기존의 인본주의가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신성화하고 있다고 할 때 한류를 통해 보여지는 신성한 힘은 연대와 연결에서 나온다. 이것이 한류의 정신이 서구 음악이나 영화와 다르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세상에는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처럼 세상의 빛이 되는 완벽한 영웅이 존재하는게 아니다. 기발한 신기술과 재능이 문제를 해결하는게 아니다. 오직 불완전한 존재들의 연결만이 큰 힘을 만든다.

 

하지만 그 연결은 단순히 연결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정형화시켜 파악하지 못한 초구조를 만드는 연결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형식의 연결이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 낼 수 있을까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고 거기서 한국이 두각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한국인들이 문화적 컨텐츠로 표현하는 것은 그들이 87년의 민주화 운동은 물론 지난 20년간의 촛불문화제를 봐왔으며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의 중심부에 백만이상의 촛불이 불타는 것을 본 사람은 그리고 그들이 비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청소까지 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본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이게 새로운 시대라는 것을 믿게 된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선한 영향력이 그 미래를 열어나갈 것을 믿을 수 있게 치유받게 된다. 한류는 이 믿음의 자식이며 이 믿음은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할 미래의 비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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