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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한류의 궁극은 철학이 된다.

by 격암(강국진) 2022. 1. 13.

2022.1.13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를 쓴 황태연, 김종록은 일찌기 유럽은 17세기무렵부터 중국문명에 의해 거대한 충격을 받아 변했다고 말한다. 그들이 받은 충격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아마도 가장 컷던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갇혀 있던 그들이 거의 종교색이 없는 공맹철학이나 노장철학을 보았던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는 성경책에 써있고, 신이 명하신 대로 만든 대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그들은 상대적으로 이성적 사고방식에 의해 살아야 한다고 조언하는 공맹사상을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공맹사상은 인간 본성을 논하고, 백성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기독교는 신만 생각할 뿐 인간의 삶은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공맹사상은 플라톤사상과도 많이 다르게 인간의 공감능력같은 감정을 기반으로한 윤리학을 발달시켜놓았으며 중국은 이미 당시에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정치제도가 존재했는데 유럽에서는 그저 친분에 의해 관리를 지명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패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그런 귀족중심의 부패한 나라운영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더욱 열심히 중국을 연구하고 중국을 칭찬했다. 자국을 바꾸고자해서 말이다.

 

황태연 김종록에 따르면 유럽의 자유주의사상이나 계몽주의등 오늘날 세계로 퍼진 유럽의 사상이란 사실상 이러한 공맹사상의 유럽버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사상은 공맹의 무위이치 사상이며 아담 스미스를 포함하는 당시의 유럽의 지식인들은 선교사들이 가져온 중국책을 통해 이런 것을 맹자나 사마천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종교의 자유나 자유주의사상같은 것은 관용을 허용하지 않는 기독교 사상과 상당히 다르다. 지금도 한국에서 기독교는 흔히 그 불관용으로 문제를 일으키는데 어떻게 중세의 유럽은 스스로 자유주의 사상을 만들어 냈을까? 그런데 이게 사실은 거의 표절에 가깝다는 것이다. 

 

과거의 중국이 유럽을 능가한 부와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오늘날 서구가 화려하게 성공한 덕분에 크게 가려져 있지만 가려질 수 없는 사실이고 또한 본래 외부의 선진국은 자국의 지식인에 의해 이상화되어서 설명되어지는 경향이 있다. 즉 자국의 개혁을 위해서 봐라 저기 멀리 있는 이러저러한 나라에서는 이런 저런 제도를 통해서 지상낙원을 만들고 살고 있다라고 말하게 된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우리 나라의 지식인들이 해방이래 쭉 이런 일을 해왔다. 그래서 나같이 어릴 적에 선진국민들이 대단하다는 말은 많이 들은 사람은 뉴욕의 맨하턴 거리를 걸으며 충격을 조금 받기도 한다. 뉴욕사람들도 우리보다 더 더럽고, 사람들이 질서도 안지킬 때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똑같은 사람인데 뭘 그렇게 이상화했나 싶은 것이다. 

 

이제까지의 것은 말하자면 과거에 있었던 중국열풍에 대한 것이었다. 한류열풍이 부는 오늘날 우리는 과연 이것이 과거의 중국열풍 수준에 도달할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전개되어져 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꼭 한국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왜 서구인이 한국에 관심을 가질까 하는 것을 고민해서 한류열풍을 보다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과연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라는 자아성찰의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류는 이제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정확히 말하면 한류열풍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노래가 히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봉준호의 아카데미 수상조차 확실히 임계점을 넘은 한류열풍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전문가들이 동양의 한 국가에게 관용을 베푼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오징어게임의 인기이후는 그것을 확실히 넘어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즉 서구 국가들이 그저 한곡의 노래, 하나의 아이돌그룹, 하나의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 문화가 주류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문에 독일매체 투리투는 2021년을 돌아보면서 그것을 한국의 해로 꼽고 있을 정도다.  

 

자연히 작년에는 그저 재미있는 한국 영화가 여기 있다라는 보도에서 멈추지 않고 수없이 많은 한류의 분석기사들이 외국에서 쏟아졌다. 즉 왜 한국음악이나 한국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기사들이 사방에서 나온 것이다. 그 중의 많은 기사들은 한국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기자들에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정부가 투자를 많이 해서 한국 문화 사업을 키웠다는 식의 유치한 분석을 하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은 한국 문화는 사실 그들 문화의 표절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은 차츰 사라지고 이제는 한국의 민주화 역사나 선진적 정보 인프라같은 것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많아지고 있다. 즉 한국이 진짜로 선진국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태도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는 서구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사회의 후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들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비교적 선방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을 통째로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비방했지만 차츰 한국을 그런 비방에서 예외로 인정하게 되었고 오히려 그들이 배워야 할 모범국가로 소개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는 그들이 여전히 믿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중국은 통계조작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강력한 통제에 의한 것이든 코로나와 싸워서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는 영 성적이 좋지 않다. 그러니 한국같이 민주주의를 지키면서도 코로나와 싸워이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예를 지지하지 않으면 그들도 권위주의정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의 유럽의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들은 자국의 상황을 비판하고 개혁하기 위해 모범적인 예가 필요했다. 그게 한국이었던 것이다. 즉 한국은 마스크를 쓴다는데, 한국은 백신접종을 빠르게 할 수 있다는 데 왜 우리는 안하냐고 말할 필요가 있었다. 

 

작년에 있었던 보도의 흐름을 보면 올해부터 한류열풍은 훨씬 더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즉 표면적으로 어떤 노래, 어떤 음식, 어떤 패션, 어떤 드라마가 인기가 있나를 넘어서 그것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한국의 철학 자체를 수입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게 있다면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질문은 왜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과 다른가 하는 점일 것이다. 한중일을 잘 구분도 못하는 서구 사람들이 애매하게 극동아시아 문명운운하면서 한류열풍을 분석하면 자연히 그럼 나라가 더 큰 일본이나 중국이 가지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를 봐도 알겠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심층적 분석을 하려고 하는 시도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정리하는 일이며 나아가 한국의 정체성을 새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특히 일본과 중국의 많은 방해를 받을 것이다.

 

벌써 김치논쟁이니 조선족 문화니 해서 방해는 높아지고 있다. 중국은 미국보다 중국의 민주주의가 우월하다고 세계에게 자신들에게 민주주의를 배우라고 말한다. 일본과 중국은 한국문화를 그들의 일부로 파악하고 차별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의 문화보다 열등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럴 수록 중요한 질문은 왜 한국은 일본과 중국과 다르며 그들보다 우월한가라는 질문이다. 한국을 중국이나 일본과 분별하는 이 수술칼은 그들에게는 극도로 위험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거꾸로 서구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작업으로 여겨질 것이며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한류는 그저 일회성의 우연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한국에 대한 믿음도 사라질지 모른다. 만약 올해가 작년의 그것만큼 성공적이라면 우리는 한국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세계에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다큐의 내용에 뭘 넣을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의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는 식민지근대화론같은 것이 들어간 다큐를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이제 결정적 질문을 던질 차례다.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한국은 왜 외국인들에게 특히 서구인들에게 놀라운 나라인가? 이 질문에 대해 여기서 충분한 답을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할테지만 그래도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서 한국의 철학이란게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자. 

 

이미 작년에 유튜브에는 수없이 많은 외국인 인터뷰가 있었다. 그들에게 한국을 보고 놀란 것을 말해 달라고 했을 때 자주 나오는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보면 이렇다.

 

안전한 치안, 깨끗한 거리, 빠른 인터넷, 깨끗한 물, 한식, 온돌, 노인공경, 건강하고 날씬하며 피부가 좋은 사람들, 정이 많고 남을 잘 돕는 사람들, 지하철을 포함한 좋은 사회인프라, 옷을 잘입고 다니는 사람들, 집안에서 신발을 벗고 살며 굉장히 자주 실내청소를 하는 사람들. 

 

한국 사람들처럼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이 없다. 그래서 인지 한국은 얼마지나지 않아 세계 최장수 국가가 될 예정이다. 지금은 일본에 이은 2등이지만 추세로 보면 금방 추월예정이란다. 물론 서구 사람들도 건강이야기 많이 한다. 그런데 그들은 주로 영양제먹고 운동 많이 하고 굶어서 살빼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도 요즘은 그렇게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보다 일상생활적, 환경적 요인을 신경쓰는 것같다. 따뜻하고 깨끗한 집에서 살 것과 특히 좋은 것을 먹을 것을 강조한다. 밥과 몸은 하나다. 한국인만큼 '몸에 좋아'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 조깅과 아령으로 몸을 단련하는 것이 서구식이라면 한국인은 뒷산에 등산하는 식이고 서구인들도 요가를 하고 참선을 하지만 한국인은 마음의 안정이 건강의 핵심이라는 메세지가 훨씬 더 체화되어져 있다. 

 

내가 이러한 내용을 여러번 읽으면서 생각해 본 결과 나는 한국인의 특성이 정의 철학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이라는 말은 외국인들이 잘 번역하지 못하는 말이다. 심지어 미운 정이라는 말도 한국에는 있으니 정을 LOVE로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집단주의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그와는 다르며 서구의 개인주의와 다른 것이다. 개인주의나 집단주의는 소통과 감수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에는 다른 무엇보다 분명히 나눠지지 않음과 소통의 정신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한국의 수필가 윤오영은 그의 수필속에서 정에 대해 이런 구절을 쓴다

 

정이란 하나의 면면히 흐르는 리듬이다. 절단된 데는 정이 없다. 비정의 세계다. 정이란 시간과 공간에 뻗쳐 무한히 계속되는 생명의 흐름이고 자연과 역사와 인간의 유기적인 유대다. (윤오영, 곶감과 수필중 촌가의 사랑방)

 

우리는 처음 본 사람도, 나에게 미운 짓만 하는 사람도 나와 인연이 있어서 보게 되면 인사도 하고, 그래도 뭔가를 도와주려고 한다. 정이란 극도로 미운 사람도 냉정히 분리해 내지 않는 융합의 감정이다. 온갖 미운 꼴을 보면서도 같이 사는 부부가 우리는 애정이나 사랑으로 산다고 하지 않고 정으로 산다고 말할 때 그들이 말하는 바는 좋은 일, 나쁜 일을 같이 겪으면서 그들이 이제 상당히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미 하나의 몸이니 끊어내는 것을 상상도 하기 힘들다. 그것이 너무 아플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심지어 미운 정도 정이라고 말한다. 내 주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내 주변의 흙과 나무 그리고 음식과 옷을 생각하고 의식하는 일은 모두 정의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확실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친환경적인 철학이다. 

 

정의 철학이 집단주의나 전체주의와 다른 것은 후자의 것들은 무감각함에 근거하지만 정의 철학은 반대로 예민한 감수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눈치가 빨라야 한다는 말이 흔하다. 정이란 사람과 환경에 민감한 것이다. 상대방의 안색이 변하는 것에 민감한 것이다. 내 아이가 아니지만 길가의 아이를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옳은 일을 한다는 태도와도 다르고 서구의 이성주의와는 당연히 다른 것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대의 흐름과는 오히려 상통하는 것인데 섯부른 일반화와 이념화를 통해서 보편성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당장 내 앞에 놓인 것, 내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것, 내가 소통하고 느끼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이전에 느끼는 것이다. 

 

정이란 한국인의 사회적 미덕의 근원이기도 하다. 고문당한 학생을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이러면 안되는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 정이다. 계산을 하고, 따져서 이래도 되나를 생각하지 않는다. 도로 한가운데 떨어진 못을 보면 나와는 상관없지만 지나가는 차가 사고를 당할 것을 걱정한다. 정이 많은 사람은 감수성과 상상력이 뛰어나고 그래서 오지랍이 넓다. 여기저기 참견하느라 바쁘다. 한국사회는 흔히 매우 역동적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사회 참여를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촛불 탄핵이라는 역사에 없는 무혈혁명같은 것에 왜 시간쓰고 돈써서 참여하는가? 다 정때문이다. 꼭 이념이 아니다.

 

이게 한국을 다 말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을 한국이게 만든 것에는 온돌과 한글이 있다고 나는 늘상 말해 왔다. 이런 기술적인 영향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냥 정의 철학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 정의 철학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반도라는 땅 안에서 하나의 국가공동체로 살아온 기간이 길어서 저절로 생긴 감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단군신화도 홍익인간을 말할 정도다. 신의 질서를 지켜라라던가, 너에게 번영을 약속하겠노라가 아니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가 단군신화다. 널리 이롭게 하려면 적어도 남의 안색정도는 살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정의 철학의 뿌리는 참으로 깊은 것같다.  

 

워낙 가난할 때 우리는 한국인의 철학이고 특징이고 따질 것이 없었다. 그럴 때는 그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이제 한국도 선진국이 되어 여유가 생기고 보니 오히려 더욱 더 한국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일이 필요해졌다. 예전에는 나아가야 할 길이 분명했고 그것이 먹고 사는 일의 해결이라는 원초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보다 추상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세계는 한국에서 뭔가를 느끼려고 한다. 인류가 하나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주 많기도 하다. 우리도 또한 자기를 발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이 잘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한류의 궁극이 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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