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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문화는 철학이다.

by 격암(강국진) 2022. 2. 24.

22.2.24

중국은 일찌기 문화적으로 서양을 일깨웠다. 서양의 중세는 지극히 종교적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중국의 문화를 접하고 보니 신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 이성중심의 풍요로운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충격이었고 이때문에 중국 특히 공자와 맹자로부터 서구의 산업혁명과 르네상스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이 모두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18세기까지만 해도 중국은 서구보다 풍요로웠고 우리도 그랬다. 예를 들어 조선의 정조무렵 그러니까 18세기 말만해도 전세계에서 가장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았던 것은 조선이었으며 중국도 그 못지 않았고 서구는 아직 여기에 도달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아편전쟁이다. 아편전쟁은 중국의 전신인 청나라가 무너지는 1840년경의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의 시작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아편전쟁은 한마디로 중국은 영국의 물건을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데 영국은 차를 비롯한 다량의 중국물건을 수입했기에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마약인 아편을 중국에 팔았다. 그리고 이것을 중국이 중단시키자 전쟁이 일어났고 청나라가 진 것이다. 이는 사실 마약밀수업자를 단속했는데 마약밀수업자가 정부를 전복시킨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문화적으로 영국 나아가 유럽은 당시의 중국보다 뒤져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유럽은 중국을 배우려고 하고 중국 문화를 수입하는데 중국은 유럽물건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영국의 무기가 중국보다 강했을 뿐이다. 이게 1840년의 일이다. 

 

이때에 비하면 지금의 한류열풍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18세기의 중국인들은 자기식대로 살았고 서양이 오히려 중국을 흉내냈다. 반면에 오늘날 우리는 대개 서양식으로 생활한다. 서양식 옷을 입고 서양식 학교를 운영한다. 서양의 유명인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철학을 배우며 정치체제도 기본적으로 서양의 것을 수입한 것이다. 건축도 그렇다. 지금의 서울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20세기 초반의 맨하탄 모습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02층의 건물로 1931년에 완공되었다. 서울을 채운 빌딩은 서구의 소위 모더니즘 건축을 따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겨우 조금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서구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우리는 한없이 겸손해야 할 것이다. 영화 한편, 드라마 몇개, 가수 몇명으로 지나친 자만감을 가지는 것은 곤란하다. 

 

하지만 동시에 문화는 철학이다라는 것을 기억하고 한국문화컨텐츠가 세계에 통하는 현실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해 보는 일도 중요하다. 과대평가는 나쁘지만 한국의 문화적 인기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도 좋지 않다. 우리는 문화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며 왜 하나의 문화가 외국에서 인기를 얻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한다. 문화수출을 너무 비하해서 생각하면 단순히 그걸 운이라고 파악하거나 저렴한 제작비 같은 잔재주로 현실을 같이 절하하게 된다. 그래서는 뭔가를 더 배울 수도 문화 수출을 더 키울 수도 없다.

 

문화는 철학이다. 문화는 삶의 방식이며 그 안에는 가치판단에 대한 철학이 녹아있다. 이걸 잘보여주는 것이 한국의 식문화다. 한국인은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단순히 기름지고 입에 좋은 것만을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좋다는 것을 두루 먹으려고 한다. 적어도 반찬 몇가지는 있고 국이 있어야 식사다운 식사라고 생각하지 단순히 배만 부르고 고기만 있으면 제대로 된 식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 만큼 '몸에 좋은' 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사람도 없다.

 

'입에 좋은'이 아니고 '몸에 좋은' 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한국에서는 또한 심신을 둘로 명확히 나누는 데카르트식의 이원론은 없다는 것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한국인이 말하는 건강은 심신이 하나로 건강한 것이다. 그걸 위해 우리는 우리 주변의 것을 먹는다. 한국의 산에는 어디에나 절이 있고 한국은 선불교가 널리 퍼져있다. 어쩌면 우리의 이런 문화는 고려 시대 이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불교국가였던 고려이래 진리를 깨달은 도통한 자가 된다던가 장생불사하는 진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풍토가 한국에 널리 퍼져있기에 이런 문화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중국의 도교나 불교가 들어온 영향이 아니라 원효같은 사람이 그것들을 주체적으로 해석한 결과가 전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아뭏튼 우리는 깨달아 고통을 겪지 않는 심신이 건강한 인간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날마다 '몸에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한국인은 심신을 둘로 가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과 나를 잘 나누지 않는다. 한국인의 정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미운 정이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뜨거운 얼음같은 모순된 말이지만 한국인이라면 이해한다. 한국인은 그것이 나쁜 것이건 좋은 것이건 우리와 접촉한 것은 소중한 것이고, 인연이 있는 것이고 나아가 우리의 자아의 일부 나눠준 것이라고 이해한다. 즉 어떤 식이건 접촉을 소중히 여긴다. 돌을 한번 만지면 그 돌에 정을 느끼고 집에 살면 그 집은 그저 물건이 아니라 내가 정을 준 장소가 된다. 일단 정이 통하면 그것이 어떤 상대이건 그건 그냥 남이 아니다. 그리고 정중의 정은 가족간의 정이고 우리는 특히 몸을 나눠준 엄마와 자식간의 정을 가장 깊은 것으로 친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거나 개인적인 것이다. 깨달음도 정도 마음속에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이래 크게 바뀌었다. 객관성을 강조하는 주자학을 중심으로 새 나라를 새운 우리 조상은 5백년간 이 유학을 실천했다. 학교를 세우고 무를 억압하고 문을 숭상했으며 유학의 원리에 따라 정치를 했다. 모든 것이 마음속에만 있다면 글을 써서 남기는 것은 필요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은 너무나 방대해서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다. 뛰어난 인쇄 문화,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한글같은 문화 유산을 남긴 문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사람은 모름지기 태어났으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문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것이 지식중심의 시대를 맞이해서 한국경제 번영의 밑거름이 된다. 

 

이렇게 보면 한국 문화가 말해주는 한국인의 꿈은 두가지다. 하나는 심신의 건강이다. 심신이 건강한 것은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 뿐만 아니라 다르게 말하면 그 자체가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왜냐면 한국인이 말하는 심신의 건강이란 짐승남이 되거나 철인삼종경기에서 우승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도달하여 평안함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신을 수련하여 깨달은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먹고 마시고 읽고 쓰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입신양명이다. 조선시대이래 만들어 진 이 지극히 유교적인 꿈은 자신의 뜻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보편성을 가진 즉 객관성이 있는 진리를 깨닫고 그 뜻을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널리 퍼뜨리는 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꿈이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이 두 가지 꿈들에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삶속에는 이런 꿈들이 알게 모르게 사방에 스며있다. 이런 한국 문화는 해외로 수출되면서 오히려 더 정화되고 있다. 외국이 한국을 발견하면서 한국도 한국을 발견한다. 사실 한국인은 한국을 잘 모른다. 그런데 이제 그 한국을 세계인들이 전보다 훨씬 더 많이 봐주고 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다. 난 인도사람인데 한국이 이렇다고, 난 독일인인데 한국이 이렇다고.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 안에 당연한 듯이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더 보게 된다. 

 

외국인들이 처음부터 무슨 철학에 공감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들은 그저 불고기가 맛있었다거나 한국의 설날풍경이 재미있다거나 온돌이 있는 한옥이 그들의 집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가족 드라마가 재미있었고 멜로 드라마가 재미있었으며 팬들을 잘 챙기는 아이돌 그룹이 멋져 보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머지 않아 질문하게 된다. 도대체 한국적이란 것이 뭔가 하고 말이다. 결국 철학이 되는 것이고 꿈이 되는 것이다. 한 사회가 꾸는 꿈이 그들의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들은 그 문화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한국인이 미국 문화에 매력을 느낀 것도 따지고 보면 자유와 평등과 무한한 발전을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아메리카 드림은 21세기에 빛이 바래고 있다. 적어도 전처럼 빛나지는 않는다. 슈퍼맨같은 영웅이 인류를 구원하는 이야기는 이제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진지함이 없어 보인다. 중국의 꿈은 파괴적이고 유지가능하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다. 왜냐면 중국몽이란 결국 무절제하게 중국이 온 세계를 먹어치우는 제국주의, 민족주의의 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꾸는 꿈은 어떨까. 내가 위에서 말한 것은 반드시 앞으로도 한국인의 꿈이 될 필요는 없고 꼭 그것만이 한국인의 꿈이 될 필요는 없다. 사실 미국인의 꿈도 중국인의 꿈도 위에서 말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꿈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떤 꿈이 우리의 문화를 대표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치관이고 철학이며 한국 문화의 매력을 결정하게 된다. 그 설득력이 한류열풍이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문화는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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