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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여러개의 진실, 당신의 진실

by 격암(강국진) 2022. 8. 3.

22.8.3

우리는 흔히 하나의 가정을 따른다. 그것은 우리가 설혹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라도 진실이란 것은 오직 하나이며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상자 안에 있는 주사위가 지금 3인지 5인지 비록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진실은 존재하며 그것은 하나라는 식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쉬뢰딩거의 고양이가 생각나고 양자역학이 생각나지만 양자역학만 이런 문제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그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이 있다고 하자. 이 질문의 답이 하나이며 분명히 존재하나? BTS의 모자가 1억의 가치가 있다고 하자. 이 가치는 오직 하나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일단 사람의 마음에 대한 질문이나 가치에 대한 질문은 진실의 객관적이고 유일한 존재라는 가정과는 맞지 않아 보인다. 미래는 어떨까?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일 뿐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오직 하나로 존재하는 것일까? 설혹 그런 경우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언제나 그럴까? 예를 들어 나나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한다면 우리는 일단 여기서 말하는 나와 대한민국 그리고 그 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건 정말 확실한가? 지금 살아있는 대한민국 사람이 한 사람도 생존하지 못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어도 그것이 대한민국의 번영인가? 그 부유함이 비트코인 기준이라도 이것은 정말 번영인가? 달러 기준이나 고층빌딩의 숫자 기준이면 혼란함이 없는가? 

 

이샤야 벌린은 낭만주의 시대이전에는 계몽주의라고 불려야 할 이런 관점이 세계를 지배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적어도 수많은 사람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맞으면 네가 틀리고 네가 맞으면 내가 틀리다는 배중률의 논리도 이를 전제하고 있다. 계몽주의는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패러다임만 존재한다는 시각이라서 다수의 패러다임이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의 변화도 가능하다는 관점에서는 이것은 옳지 않다. 진실은 관찰에 의해서 구해질 수 없는데 그 관찰은 우리의 믿음, 우리의 형이상학, 우리의 언어, 우리의 철학, 우리의 패러다임에 기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설혹 그 답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시대의 봉건제를 믿는 사람과 현대의 공화정을 믿는 사람에게 그 의무란 다른 형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다시 구체적인 예로 돌아가서 이 문제가 우리의 일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일상속에서 끝없이 어떤 이유를 대고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사람들을 그리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오늘은 데이트가 하고 싶었지만 비가 와서 할 수 없었다는 식이다. 이렇게 말한 후 당신은 스스로 이것이 유일하고 객관적인 설명인 것처럼 여기고 말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을 수 있다. 비가 오면 데이트가 정말 불가능했을까? 우리가 만나는 것이 정말 데이트이기는 한가?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일까? 유한한 존재인 사람은 본래 완벽하게 일관성이 있지는 않지만 완벽은 커녕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어 보이는 것이 종종 우리의 행동이다. 예를 들어 다음의 문장들을 보자.

 

그녀는 떡볶이보다 소중하다.

비가 오면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포기한다.

떡볶이를 먹기 위해서라면 나는 비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문장들은 일관성없는 행동을 보여준다. 제일 처음의 문장이 옳다면 뒤의 두 문장은 이상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뒤의 두 문장처럼 행동하면서 스스로도 첫 번째 문장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사는 경우는 많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것은 일관성이 없는 행동이 아니다. 그들은 거기에는 어떤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들과 행동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는 점점 상대방의 정신세계에 깊게 들어가게 된다. 그가 말하는 소중하다나 사랑이란 무슨 말일까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너무 소중할지 모른다. 마치 고양이나 개 같은 애완동물이나 자동차처럼. 그런데 이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인가?

 

일상 속에서는 흔히 던져지지 않는 이런 질문들이 향하는 곳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정신적 문화적 패러다임이다. 우리는 대개 수없이 많은 당연한 가정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꺼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그 질문되지 않은 당연함들이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인종차별주의자는 적어도 대부분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생각도 없다. 그냥 이 인종이 이렇게 다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가 이러저러한 권리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존재하는 차별에 대해서 너무나 얄팍한 설명이 주어져도 그나 그녀는 그걸 냉큼 인정하고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이 정도 일을 하고 1억을 받는데 누군가는 천만 원을 받는다. 그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건 차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나는 그녀를 미칠듯이 사랑하지만 비올 때는 바깥에 나갈 수 없을 뿐이다 같은 설명과 비슷하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과거의 가문주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 가족은 모두 같은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다. 각 가족은 자기의 위치가 있는데 사실 그 위치는 그냥 태어난 순서 따위로 정해진 것이다. 이것이 21세기의 사회적인 환경과 맞는가 맞지 않는가는 이런 사람에게는 질문되지 않는다. 그냥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가 자식이나 형제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생각도 그에게는 떠오르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말 얄팍한 이유만 주어져도 그걸로 그 차별은 정당화된다. 그건 그냥 다 이유가 있는 합리적인 판단일 뿐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가장 무서운 학대는 사랑의 이름으로 종종 행해진다. 그들은 너무나 누군가를 사랑한다. 다만 세상이 원래 이럴 뿐이다라는 생각으로 그나 그녀는 그런 행동을 하고 만다. 나는 나의 딸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서라도 그녀의 공부를 막고 그녀에게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식의 말은 세상에 너무나 흔하지 않은가? 노동자를 자식처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노동자가 비참하게 죽어가도록 만드는 사람도 세상에는 너무 흔하지 않은가? 입만 열면 세상에는 우리 가족뿐이다 같은 말을 하면서 실은 형제자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 학생을 사랑하는 선생님은 어떻고 국민을 사랑하는 정치가는 어떠하며 죽고 못 사는 우정을 나눈다는 친구들은 어떤가. 

 

중요한 것은 패러다임이다. 이 말은 하나 이상의 패러다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자연히 이 글을 시작하며 썼던 유일하며 이미 존재하는 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쪽 패러다임과 저쪽 패러다임 사이에는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너무나 확신하지만 나에게 그녀는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일 뿐이며 그녀가 하는 것은 그저 학대로 보이는 식이다. 이럴 때 단 하나 존재하는 진실이라는 감각에 기초하여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을 그녀는 답답해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떡볶이를 위해서 언제나 행동하지만 남자를 위해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그녀도 자신이 자신의 남자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생각한다고 진심으로 느낄 수 있다. 룸살롱 같은 성매매업소를 계속 드나드는 남자도 자신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변함이 없으며 이건 그저 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말할지 모르고 그것이 진심일 수 있다. 오히려 그런 문제를 기분 나빠하는 그녀가 극단적이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물론 소통을 노력하며 여러가지 증거들을 말하고 우리의 생각을 설명하면서 이 차이가 메꿔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분명 그것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당나귀에게 당근을 준다고 무조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움직일까 말까는 결국 그 당나귀의 결정이다. 게다가 패러다임에는 놀라운 설득력이 있어서 그저 몇 명의 사람이 자신에게 찬동해주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금방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당신의 애끓는 호소를 이야기하면서 너는 너무 말이 많다고 할 것이다. 다시 하나뿐인 그들만의 객관적 세계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까지의 말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현학적인 말장난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건 절박한 말들이며 무서운 말들이다. 우리는 얼마나 대충 살고 있는가. 우리는 혹시 우리의 생명, 우리의 인생을 쉽게 쉽게 내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관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이유들을 정말 이유라고 믿으며 환상 속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의 목줄을 어떤 광기 어린 사람들이 잡고 있게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이 따져봐야 할 것이다. 당신의 진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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