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8
최근 윤영덕 더불어민주당의원은 사이버 성범죄를 징역 1년까지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대표발의했다고 한다. 이 문제를 보도한 한경의 기자는 기사를 사이버성범죄의 위험성에 대부분 할애하고 겨우 마지막 문장에서 법적혼란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언급하고 이 기사를 끝마친다 (링크는여기). 하지만 나는 이런 식의 반응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날로 비현실적인 법이 될 것이다.
세상에는 이미 여러가지 게임의 세계라고 할 자치적 공간이 있다. 예를 들어 권투선수들이 시합을 하면서 서로를 두들겨 패도 그것이 폭행죄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해수욕장에서 거의 누드로 돌아다닌다고 해도 그것이 공연음란죄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온라인 게임상에서 하루에 수천명을 학살하는 사람이 나온다고 그가 살인죄로 기소되지도 않는다. 연극이나 영화촬영장에서 배우들이 서로의 몸을 만진다고 그것이 성추행이 되지 않기도 한다.
이런 예들은 우리가 친숙한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런 예들을 들으며 '이건 상황이 다르지. 여기서는 서로간에 합의가 있는거잖아.'라고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상황이 꼭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들이 있다. 그것은 그런 자치의 공간이 어떻게 존재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남편이 권투선수로 나가서 두들겨 맞아 병들었다고해서 아내가 법원에 상대선수를 폭행죄로 기소하고 그걸 법원이 그렇다고 인정하는 때가 온다면 권투라는 게임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합의를 했다고 해도 배우들이 언제나 '내가 합의한 것보다 더 많이 더 오래 만졌다.'라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성추행으로 고소하고 법원이 그걸 언제나 유죄로 판정한다면 영화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해수욕장에서 여자들의 벗은 몸을 보는 남자들은 많다. 그들의 시선은 적어도 어느 정도 성추행적 소지가 있다. 하지만 그걸 모두 성추행으로 고소하고 유죄판결이 내려진다면 해수욕장에서 남녀가 함께 수영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그냥 하나의 단일한 장소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것은 하나의 법이 통치하는 거대한 공간이지만 실은 그 안에는 다시 자치를 허용하는 작은 공간이 있고 그 작은 공간들은 다시 더 작은 공간들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걸 게임으로 말하자면 거대한 게임의 안에 작은 게임이 있고 그 작은 게임안에 다시 더 작은 게임이 있는 식의 구조를 가지는 것이 세상이다. 세상은 하나의 단일한 규칙이 통하는 공간이 아니다.
왜 그럴까? 왜냐면 세상에는 여러가지 사람들이 살기 때문이다. 보편성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것만이 정의인 것같지만 문자로 표시해서 그것의 권위에 기반하여 세상을 통치하는 법률은 다양한 세계속에서는 언제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법률만능주의에 빠져서도 안되고 너무 보편주의에 깊게 빠져서도 안된다. 물론 여기에는 강력한 전제들이 있다. 예외를 허용하는 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참가하는 사람들끼리의 합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려운 부분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가 뭐냐는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걸 매우 좁게 해석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이버 성범죄같은 것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예를 들어보자. 불륜은 도덕적으로 배우자에게 배신을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옳지 않은 행위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불륜을 사법적으로 이제는 처벌하지 않을까? 법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 옳은 행위라는 뜻이 아니라 애정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이들은 흔히 점점 더 많은 개인사를 법률의 문제나 대중 재판의 문제로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하면 두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는 복잡한 세상에서 법률로 다뤄야 할 문제가 증가한다. 또 하나는 그 법을 판정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의 권한이 올라가고 일이 많아지면서 엉터리 판정이랄 것도 증가하여 결국 법률의 피해자가 생기게 된다. 모두가 나쁜 일인 걸 알고 있는데 오히려 법률이 무죄를 선언해서 그 사람을 도와주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법이 최소한의 정의인 것은 그걸 넘어서려고 할 때 최소한의 정의조차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의하지 못할 사람도 있겠지만 법률은 너무 복잡해지면 오히려 구멍이 생기며 도덕이 타락하고 만다. 그럴 때 우리가 필요한 것은 첫째로 좋은 세상은 좋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즉 우리의 행동이 언제나 필요하다. 법만으로 되는게 아니다. 우리는 자주성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자치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모두 사람들이 꼭같이 사는 것이 아닌데 그걸 법조문 하나로 통일시키려고만 들지 않고 적절한 조건하에서는 자치를 허용하는 것이다. 농구와 축구는 다르다. 농구하는 사람들에게 왜 공을 손으로 잡냐고 해서는 안된다. 자치와 각자의 문화에 대한 존중을 가져야 이 복잡한 세상을 살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자꾸 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때마다 생겨는 수많은 예외적 상황때문에 문제를 더 키울 수 있다.
법률만능주의는 세상을 심심하게 만들고 발전하지 못하게 만든다. 정부가 좁쌀같은 마음으로 세상일에 모두 관여하려고 할 때 그 정부가 하는 일은 세상의 발전을 막는 일이다.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돕거나 막겠다고 나서면서 말이다. 한류가 인기를 얻을 때 정부가 그점을 잊으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은 이때문이다.
사이버 성추행의 문제가 해결되는 바람직한 방향은 바깥 세상이 사이버공간 안의 법률까지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 안의 세상에서 그안의 사람들에 의해 나름의 대처를 하면 된다. 길에서 성범죄를 저지르면 법원에서 재판받고 감옥에 갈 수 있듯이 사이버 공간에서 그렇게 하면 그 안에서 체포되고 재판받으면 된다. 그럴 때 아이디를 삭제당한다거나 접속을 일정기간 못하게 하면 그 공간 안에서 질서가 잡힐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공간이 있다면 그 공간은 인기가 없어질 것이고, 싫고 위험하다면 그런 곳에는 가지 말아야 한다. 위험한 공간에 대해서는 홍보도 필요할 것이다. 권투의 예를 기억하라. 권투하러 가서 폭행당했다고 신고하는 일이 법률로 정해지면 권투 자체가 없어진다. 사이버 세계에 대한 법률을 척척 만들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미래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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