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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새로운 인간

인간으로 산다는 것.

by 격암(강국진) 2022. 12. 20.

22.12.20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21세기이지만 우리는 매우 비과학적이고 애매한 사고를 하면서 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한 과학은 아직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의 과학은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영혼이나 혼백따위의 개념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 나는 과학적인 인간이라 그걸 믿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은 많겠지만 이런 걸 생각해 보라. 3살무렵의 아이와 그 아이가 자라서 20살이 되었을 때의 인간은 서로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확연히 다르다. 우리는 왜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법적으로 그렇게 취급할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우리는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을 같은 사람으로 여기며 권리를 인정하고 의무를 주장하지 않는가?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 있는 것은 사물은 변하지 않는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말은 말이고, 천한 것은 천한 것이며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같은 사람인 것이다. 생명체의 경우 특히 사람의 경우 그 본질을 지칭하는 말이 바로 영혼이니 혼백이니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본질론은 물질적으로 세상을 보는 과학의 눈으로 보면 근거가 없다. 아니 틀린 것이다. 시체와 살아있는 사람 사이에 물질적인 차이는 없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시동을 건 자동차와 끈 자동차 사이의 차이 이상의 것을 볼 수없으며 당연히 영혼이니 혼백이니 하는 것은 유령처럼 과학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가 다시 한번 비과학적이 되는 부분은 우리는 사물의 본질이 공간적으로 제한된 곳에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즉 시간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본질은 공간적으로는 저기 어디 공간의 한 부분에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 말한 인간의 영혼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는 우리의 몸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육체적으로는 어떻게 볼까? 어떤 사람들은 육체를 영혼처럼 본다. 그런데 육체는 분명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이건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이다. 예를 들어 팔이 사라져도 우리는 그 사람을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심장이나 뇌라고 해도 성장 퇴화를 하거니와 평생 같은 세포로 이뤄진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뇌를 바꿀 수 있다면 그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여기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21세기에는 흔히 뇌가 인간의 영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런 생각도 과학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뇌도 여러 부분이 있고 수술로 일부를 잘라낼 수도 있다. 영혼이 뇌에 있거나 뇌의 특정부위에 존재한다는 식의 생각은 옳지 않다. 

거울을 들여다 보라. 세상에 영혼이 있고 당신의 영혼은 거울을 들여다 보는 그 육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래서 나는 여기 있다라고 믿는 생각은 비과학적이고 애매한 생각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우리는 여전히 원시시대에 애니미즘을 믿으며 살았던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의 사고는 우리의 언어와 사고속에 여전히 뿌리깊이 남아 있다. 

과학적 사고 나아가 환원주의의 뿌리에는 고립의 개념이 존재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관찰하고 연구하려는 대상이 나머지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분석이나 이해는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짚신벌레를 현미경 아래의 유리판위에 올려놓고 관찰한다고 하자. 우리는 이 관찰의 상황에서 짚신벌레가 그 유리판 바깥의 세상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관찰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좋은 예는 거울인데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 보면 그 안에 우리가 보인다. 우리는 거울안에 보이는 것이 바깥 세상에서 온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거울안에 또다른 내가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보인다는 관찰의 결과를 무시한다. 거울을 고립시켜놓으면 거울안에 뭐가 보일까라는 질문은 말이 안된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행동 자체가 고립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짚신벌레는 고립시켜 놓고 관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짚신벌레가 사실은 마력을 가진 지적인 생물이라서 모든 인간들이 보지 않을 때는 화성인같은 외모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인간이 볼 때마다 그것을 알아채고 우리가 아는 짚신벌레로 변신하여 그렇게 사는 척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짚신벌레는 외부와 고립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짚신벌레는 유리판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짚신벌레인가 아니면 거울인가?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인 질문이 아니다. 뇌과학연구실에서는 보통 동물실험을 많이 하는데 측정의 간편함 때문에 쥐나 원숭이를 처음에는 마취하여 의식이 없는 상태로 만들고 그 뇌활동을 관찰하고는 했다. 그런데 이런 관찰도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질문이 남는다. 죽은 원숭이의 뇌와 살아있는 원숭이의 뇌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이 없는 원숭이와 깨어있는 원숭이는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 

여기서 독자들은 물론 깨어있는 원숭이를 봐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행히 기술의 발전으로 그것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요즘 일론 머스크가 뉴럴링크라는 회사를 가지고 머리에 전극을 박아넣은 원숭이가 컴퓨터 커서를 생각으로 움직이는 실험을 소개하는데 이런 기술들은 바로 뇌과학의 실험실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생긴다. 원숭이가 깨어있으면 다 똑같은 가? 그 환경의 차이가 결과를 바꾸지 않을까? 깨어있으되 암흑속에서 꽁꽁 묶여있는 원숭이와 친한 사육사와 같은 방에 있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원숭이 그리고 밀림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원숭이의 뇌는 모두 다른게 아닐까? 이건 물고기를 물바깥으로 빼내어 겨우 살게만 해놓고 그 행동을 연구하는 것과 같은게 아닐까?

본래의 질문을 기억하라. 인간은 짚신벌레인가 아니면 거울인가? 원숭이나 쥐도 의식상태나 주변의 환경에 따라 뇌의 상태가 바뀐다. 즉 고립에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그런 동물들은 이론적으로 자연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살면서도 그 바깥의 관찰자가 그 동물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관찰을 하는 상황을 상상이라도 해 볼 수 있다. 짚신벌레라면 유리판이면 충분하지만 쥐나 원숭이라면 그보다 훨씬 크지만 유한한 어떤 생태계를 만들고 그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인식은 그 세계의 안쪽에 제한되어 있다고 우리는 믿을 것이다. 어떤 원숭이도 그 인식의 벽 바깥쪽을, 그 무지의 벽 바깥쪽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원숭이다. 이런 생각은 원숭이의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 공간적으로 원숭이의 몸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말하는 고립을 논할 수 있는 환경전체에 퍼져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안에 있어야 원숭이는 원숭이인 것이다. 

인간의 경우는 어떨까? 인간의 경우는 모순이 생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인식의 벽안에 인간이 고립되어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상상하고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그 벽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 벽을 인간이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는가?

추상적이 되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여기 하나의 작은 마을을 만든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 안에서 사는 인간을 몰래 관찰하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연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다. 이게 인간의 연구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이 글의 문맥에서는 문제가 있지만 설득력이 전혀 없지는 않다. 의식이 없는 인간의 몸을 연구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무의미하지 않은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작은 마을 안에 사는 인간이 정말 그 마을이라는 테두리 바깥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할 때 그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이것은 마치 아이큐가 50만 넘으면 탈출할 수 있는 감옥을 만들고 사람을 넣어 실험하고 관찰하는 것과 같다. 그 감옥안에 남는 사람들은 모두 아이큐가 50 미만일 것이다. 그게 아니면 다 탈출했으니까 그렇다. 그렇게 해놓고 인간을 관찰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인간의 아이큐는 50미만이라는 것이다. 이게 인간의 연구인가? 그게 인간인가?

인간은 10만년이나 40만년전에 탄생하고 출현한게 아니다. 그때의 인간이 지금의 인간과 똑같은 DNA를 가졌다고 해도 그렇다. 그때와 지금의 인간이 같다고 믿는 것은 핵폭탄을 만들 설계도가 적힌 종이와 빈 종이가 같다고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하드웨어 이상으로 소프트웨어고 인간의 육체는 OS가 없는 컴퓨터 이상으로, 종이 이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다. 인간은 종이가 아니라 그 종이위에 쓰여진 뭔가에 더 가깝다. 인간은 문자의 발명이래 언어가 정교해졌고 정보를 훨씬 더 효율적으로 많이 누적시키면서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만들어진 사이보그이고 진정한 인간의 의식은 문자시대이래 눈을 떳다고도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인식의 한계는 계속 크게 확장되었다. 아직도 세계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수렵채집인의 경우에는 우리가 원숭이를 연구하듯 어떤 고립을 정당화하면서 그들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테두리를 현대인인 우리는 만들고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 관습적으로 그 수렵채집인을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동물중에서 유일하게 그 인식의 한계를 엄청나게 넓혀온 존재이며 지금도 더 넓혀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인간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어제의 인간은 우리가 오늘 말하는 인간이 아니다. 본질주의적 사고는 인간은 태어나고 변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은 그 변하지 않는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인간이라는 점, 우리가 우리라는 점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사소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인간이며 계속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본질주의적 사고는 영혼을 믿는 원시인의 사고이며 인간은 짚신벌레가 아니라 거울이다. 인간은 육체가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다. 원숭이의 본질이 원숭이의 인식의 세계 전체에 퍼져있듯이 인간의 본질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 전체에 퍼져 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지금 이순간에도 맹렬히 확장되고 있다. 원숭이처럼 유지되는게 아니다. 내가 이 육체이며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내게 영혼같은 게 있는데 그게 여기에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꿈을 꿀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여행도 가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눈다. 그리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알게 된다. 사실 그 꿈속에서 대화를 나눴던 것은 모두 나였다. 내가 나와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 거리와 산도 사실은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가 말하는 나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구운몽이라는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긴 꿈을 꾸고 깨어난다. 일생을 살았는데 깨어나 보니 모두 꿈이라는 이야기다. 내가 말한 것들은 이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작은 세계안에서 한마리의 짚신벌레처럼 산다. 맛있는 차가 좋고 찻잔의 따뜻한 감촉이 좋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쉽게 지치는 존재이기에 대단하면서도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시공간적으로 제약된 지금 여기에 산다. 적어도 때때로 지금 여기로 돌아와 한마리 짚신벌레처럼 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인간은 얼마 살지 못하고 지쳐 죽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인간은 그런게 아니다. 때때로 우리의 정신은 날아 오르고 지구나 이 우주가 작아 보일 정도로 부풀어 오른다.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찾고 수백년에서 수천년전의 과거를 돌아보는가 하면 인간 문명이 만들어 낸 온갖 기괴한 결과물들을 다 둘러 본다. 진짜 나는 한마리 짚신벌레이고 이건 그저 공허한 꿈이라는 말은 헛소리다. 그랬다면 우리는 여전히 침팬지로 살 것이다. 사실 날아오른 이게 진짜 나이며 때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그 나는 필요악일 뿐이라고 말해도 옳다. 그것도 분명 나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장자는 일찌기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 모른다고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작은 세계에 집어넣고 문을 닫아버린다. 자기를 짚신벌레나 원숭이로 만들고 다른 사람도 다 짚신벌레나 원숭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실수 일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실수 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인간이하의 것으로 살기로 하는 것은 실수다. 아무 것도 안해도 계속 나는 인간일 거라고 믿는 믿음은 본질주의가 만들어 낸 허상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 개돼지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다. 시대적으로 말하면 요즘은 문자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수렵채집인이 문명화되는 시대와 비슷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정보의 누적이 초고속으로 빨라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머리를 들고 하늘을 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의 본질따위는 없다. 그건 지금 이순간에도 맹렬히 팽창하고 있다. 그러니 자칫하면 우리는 인간이하가 되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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