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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새로운 인간

환경제국주의와 나

by 격암(강국진) 2022. 12. 27.

22.12.27

요즘엔 뉴스를 보다 보면 뚜렷히 모순되는 점을 느끼게 된다. 하나는 기상이변과 지구 온난화에 대한 소식이다. 이 문제는 이미 너무 대처가 늦었다고 행동주의자들 중에는 유명한 그림을 망치는 이벤트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학자들이 단합하여 파업을 하기도 하는 문제이며 요즘 세상의 중심에 있는 변화중 하나인 전기차로의 전환도 이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기상 이변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이제 이것을 외면할 수 없다고 하고 코로나 유행도 지구 온난화의 결과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침체와 출산률 감소 이야기가 시끄럽다. 주식과 부동산을 말하는 사람은 연일 얼마나 많은 돈들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가를 말하며 제발 소비가 살아나는 경제 활황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으며 한국의 출산률이 얼마나 기록적으로 낮은지를 말하며 이는 한국의 멸망을 말한다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다. 

 

이 두가지가 모순인 것은 잡다한 이야기와 기묘한 이야기를 제하면 전체적으로 보아 지금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환경 위기의 근원은 인간이 너무 많고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덜 버린다던가 전기차를 쓴다던가 재생에너지를 쓴다던가 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실이 인간이 너무 많고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려버리기에는 어림도 없다. 이 일은 과학발전으로 다 해결할 수 없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혁신이 필요한 일이다. 

 

예를 들어 무한 에너지라고 불리는 핵융합의 시대가 와도 그것이 문제의 모든 해결이 되기는 어렵다. 그런 시대에 지구는 마치 아파트 단지의 녹지처럼 변할 것이다. 즉 수억년의 기간동안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현재에 이른 지구의 환경은 점점 더 인위적으로 조절되고 지탱되는 것으로 변할 수 있다. 거대한 힘을 얻는 인간에 의해 바다는 어항이 되고 숲은 화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자원은 더 많이 소비될 것이고 인구는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위적 통제가 과연 에너지만으로 될까? 자연은 어딘가에서 균형을 잃고 폭주하기 쉽다. 기상이변과 코로나 유행같은 것이 좋은 예다. 그러면 또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를 써서 매우 비효율적으로 그걸 통제하려고 하고 지구는 더더욱 인위적인 곳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설사 핵융합같은 문명을 바꿔버릴 정도의 기술이 지금 당장 현실화된다고 해도 일어나는 일이다. 

 

생명을 무게로 따졌을 때 인간과 인간이 먹는 소, 돼지, 닭같은 가축들의 무게를 합치면 지구상 생명체의 90%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터무니 없는 숫자다. 인간이 너무 많아지고 너무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뭔가에 관심만 두면 그게 멸종위기에 빠진다. 예를 들어 참치도 전에는 많이 먹던 어종이 아니었는데 중국인들의 소비가 늘기 시작하자 이젠 그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선진국 이외의 국가들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선진국의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다. 멋진 집에서 에어컨을 틀고 차를 타고 다니며 고층빌딩이 있는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매끼니마다 화려한 음식을 먹고 멋진 옷을 매일 갈아입는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전세계를 돌며 여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80억 세계인들이 전부 그렇게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지구는 좁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와 지구를 위협하는 우리의 문명을 반성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흘러간 제국주의처럼 본질적인 문제를 가진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시대에 영국같은 나라는 전세계의 많은 곳을 식민지로 삼았다. 조선도 20세기초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시대가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난 것은 마음 가짐 때문이다. 문명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식민지를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윤리적 죄책감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게 그렇게 흘러가질 않는다.

 

그 근원에는 한가지 사실이 있다. 바로 어디에 태어났건 모두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흑인노예를 계속 노예로 가지고 인도인을 계속 식민지 시민으로 착취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본토인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차이가 유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육과 정보는 금새 사람들 사이로 퍼졌다. 그래서 그 차별은 정당화될 수 없었다. 따라서 단순히 힘에 의해 식민지가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다. 시대는 봉건 왕조를 공화정으로 바꿨다. 다시 말해 하나의 국가안에서도 인간 평등을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왕이나 귀족은 없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는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다. 나라안의 인간이 평등한데 어떻게 제국의 본국과 식민지에서 사람이 다르다는 주장이 유지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식민지를 해방하고 그들끼리 자치하라고 하지 않을 거라면 제국의 본국은 식민지 국가의 사람들을 인간으로 대우하고 책임져야 한다. 그게 싫으니까 식민지를 해방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다시 차별은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들은 인도인이고 중국인이지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못사는 건 우리탓이 아니다. 아마 기적이 일어나서 내일 부터 닭들이 인간만큼 인간언어를 잘 구사한다면 머지 않아 닭들은 닭들이 사는 나라로 독립하여 살게 될 것이다. 인간적인 지성을 보여주는 상대를 계속 차별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책임지기도 싫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국주의는 파탄이 났지만 자연에 대한 제국주의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을 무한한 침탈의 대상, 소유의 대상으로 본다. 인간과 자연간에는 엄격한 계층적 차별이 있어서 인간 한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공원 하나, 산 하나를 파괴하는 일도, 하나의 동물종을 멸종시키는 일도 어쩔 수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치 제 아무리 자애로운 노예 주인이라도 자기 이웃 주민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노예들 수백명이 죽는 일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것처럼 말이다. 우선 순위가 다른 것이다. 

 

봉건시대에는 공화국의 시대를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왕이 없는 나라가 가능하다는 것은 자신을 충실한 백성으로만 아는 봉건국가의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우리는 지금 다시 한번 그런 인식의 비약이 필요한 것같다. 우리는 환경적으로 제국주의를 실천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핵심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며 우리는 왜 행복해 지는가? 

 

예를 들어 당신이 나는 소비를 더 많이 함으로서 행복해진다고 믿으면서 지구 온난화를 걱정한다는 것은 마치 더 많은 노예를 원하는 노예찬성론자이면서 노예들의 행복을 걱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이 스스로를 다른 무엇보다 국적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나는 영국인이다, 나는 스페인인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인도인이나 페루인을 걱정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환경제국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이 작은 몸뚱아리에서 해방시키고 주변환경과 동일시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나를 그저 이 몸이라고 생각하니까 이 몸을 즐겁게 하고 이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며 이 몸이 아닌 것은 우리가 침략하고 소유할 대상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나라는 것이 내가 인식하고 있는 환경전체안에 안개처럼 유령처럼 퍼져있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이 나라고 인식할 때 우리는 세계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고 가치를 느낄 것이다. 환경보호는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적선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돌보는 일이다. 이런 말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대단히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어 당신이 스스로를 무엇보다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아들 딸은 사실상 당신의 일부로 존재한다. 아들 딸의 고통이나 위험때문에 여러분이 목숨을 걸거나 희생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 여러분이 그 아들 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나 자신이다. 자식이 죽으면 나는 영원히 나 자신일 수 없으며 그런 삶이 싫기에 그렇게 사는 것보다는 죽어서 자식을 살리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서구식의 환원론적 관점에 과도하게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관계에 기반한 정체성을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여기며 무시하고 그 몸뚱아리 하나를 배불리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삶의 전부라는 메세지를 세상에 너무 퍼뜨렸다. 적어도 뉴튼이래 과학적 관점은 그 인식대상을 시공간적으로 뚜렷히 분리하여 홀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이젠 사람들은 그냥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자신의 몸을 떠올린다. 이런 관점에서는 자식도 가족도 동료시민들도 다 내가 아니다. 그들이 있건 없건 내가 누구인가는 변하지 않고 파악된다. 물론 숲이며 바다며 하늘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너무나 널리 퍼진 나머지 이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그냥 어리둥절해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예를 말하고는 한다. 여기 토끼 모양의 풍선이 있다고 하자. 이 토끼 풍선을 손에 든 당신이 그 토끼 풍선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일까?  토끼 풍선이 토끼 풍선인 것은 토끼 모양때문이다. 그런데 토끼 풍선이 그 모양을 유지하는 것은 고무 풍선안의 공기와 바깥의 공기의 동적인 평형상태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토끼 풍선을 심해로 가져간다면 풍선은 찌그러질 것이고 토끼 풍선을 진공에 가져간다면 아마도 터져버릴 것이며 온도를 극한으로 올리거나 내려도 마찬가지다. 동적평형의 결과로 존재하는 토끼 풍선의 토끼다움은 그래서 공간의 어느 한 지점인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그건 마치 자식이 없는데도 아빠가 되거나 위가 없는데 아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다시 우리를 보자. 우리는 우리 몸과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동적 평형이 만들어 낸 질서인가 아니면 주변환경과는 무관하게 진공속에서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물질인가, 관계적 질서인가? 당신이 어떤 집에 살고 있고, 누구와 이웃하며 살며, 어떤 세상을 인식하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당신으로 여겨지는 그 몸뚱아리를 호강시키는 일인가?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수 있다. 그건 오히려 당신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사치와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삶의 질서가 당신을 만드는 것이고 우리는 선택을 통해 우리 자신을 조각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볼 때 우리는 어떤 의무와 권리를 가지는가? 우리는 언제 행복해 지는가? 우리는 무엇보다 주변을 둘러 볼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주변에 의해 행복해 진다. 가족적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한국의 경우에는 부모 자식을 생각해 보라. 가족이 몰락하고 괴로워하는데 내 배만 부르면 행복한가? 자식이 죽는지 사는지, 부모가 죽는지 사는지 모르는데 내 몸만 따뜻하면 행복한가? 안 행복하다면 왜 안 행복한가? 

 

더 많은 소유와 소비가 행복을 부른다는 생각은 이렇게 얄팍하다. 우리는 환경제국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선심쓰듯 자연을 걱정하는 마음으로는 자연을 파괴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일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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