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28
세상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법칙을 찾아낸다는 귀납법적인 접근 방식은 현대적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이래 너무나 성공적이었다. 때문에 그러한 사고방식은 종종 우수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넘어서 유일한 사고 방식으로 까지 생각되어진다. 이러는 가운데 인문학으로 분류되는 분야들이 점차로 위협을 느껴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지도 오래되었다. 인문학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직관을 중시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예술이 좋은 예다. 그러니까 과학과 인문학은 서로를 설명할 수 없고 서로를 과소평가하게 되며 결국 충돌하기 쉽다. 이때문에 찰스 퍼시 스노가 캠브리지에서 이 두가지 문화에 대해 강연을 한 것은 1959년이었고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가 철학과 예술분야를 포함하는 인문학만의 학문적 방법을 고민하여 진리와 방법을 출간한 것도 이미 반세기가 넘은 1960년의 일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확고하게 남아서 사람들이 정신적 위기를 가지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관찰의 결과들에서 법칙 혹은 질서를 찾아낸다는 귀납법적 관점을 과학적 관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문학은 여러모로 부족해 보인다. 일단 인문학은 과학보다 불명확한 언어를 사용해서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 게다가 과학에서 다루는 정확하고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생각하면 인문학은 부족하고 부정확한 관찰결과를 가지고 어설픈 결론들을 도출하는 3류학문으로 보인다.
물리학자인 러더포드는 심지어 자연과학조차 물리학을 제외하면 우표수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관점에서 철학이나 역사를 평가한다면 그게 어떻겠는가. 계량화를 통해 사회적 물리학이 되기를 원하는 경제학은 종종 슬픈 학문으로 불린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같은 경제학분야의 권위자들이 과연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어 낸다는 현실적 성과를 내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계량화를 시도조차 않는 인문학의 분야들은 과학적 관점에서는 그 가치와 의미가 불명확한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자기 나름의 정당화가 필요했으며 자기만의 학문적 방법론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리에 대해 우리는 여러가지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과학과 인문학은 지식의 서로 다른 두 양태라고 주장하거나 (인간을 묻는다), 인문학은 고전적 인문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진리와 방법), 어떤 일원론적 형이상학의 도입으로 통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거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기 때문에 과학의 입장에서 인문학을 통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통섭).
이 문제에 대한 처방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먼저 학자도 예술가도 아닌 보통 사람에게 조차 이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답은 각자 더 찾을 수 있다. 언제나 질문의 확실한 이해가 답보다도 더 중요하다. 이 문제가 모두에게 중요한 이유는 첫째로 과학적 관점의 힘이 점점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전문화이고 기계적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만 들어가도 우리는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이 존재하고 학생들이 여러 과목을 그들에게 배우는 것을 당연시 하게 되었다. 이런 환원주의적 관점 자체가 과학적 관점이다. 이렇게 현실 사회는 모든 곳이 과학적 논리로 재구성되어지고 있고 우리가 과학을 얼마나 아는가와 상관없이 그 안에서 과학적 관점은 유일하게 합리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마치 주자학의 나라에서 주자학이 그렇고 기독교의 나라에서 기독교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런데 글쓰기와 그림그리기 같은 예술이 그걸 구성하는 여러 조각으로 분해되어 가르쳐 질 수 있을까? 고대의 철학자에서 시작해서 현대의 철학자에 이르는 여러가지 지식을 연대순으로 나열하고 배우는 일이 정말 철학의 정수를 배우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나 철학도 현실에서는 점점 이렇게 분해되어지고 있다.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이 모두에게 중요한 두번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굳이 말하자면 인문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격과 삶을 분해하고 조립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만족스럽게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때 뭔가 삶의 핵심적 부분이 죽어 없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자유의지나 삶의 의미따위는 우리나 우리의 삶이 가진 신비감에 크게 의지한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분해되고 나열될 때 우리는 로보트가 되고 죽은 사람이 되며 우리의 삶은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과학적 관점은 삶을 죽이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우리 일상의 순간 순간들은 과학같은 학문만으로 살아질 수 없다. 당신이 어떤 직업을 택하는가 그리고 좋아하는 이성에게 청혼해야 할까 말까를 과학으로 결정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오늘날 과학적 사고를 무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고 정말 권장할 만한 것일까? 비과학적이지만 합리적 사고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은 과학에 비해 무력하다. 과학은 방대한 지식을 쌓아올려도 그 논리적 구성이 분명하기 때문에 명쾌하고 안심이 된다. 이것은 자동차의 부품이 있으면 그걸 조립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즉 엔진을 만드는 법을 몰라도 나는 엔진을 믿고 그것을 자동차에 설치해서 자동차를 달리게 할 수 있다. 이것이 환원주의적 논리적 사고의 강점이다.
하지만 철학은 그럼 어떤가. 예술은 그럼 어떤가. 철학에 대한 수없이 많은 지식의 세부사항을 몰라도 나는 그저 니체나 들뢰즈같은 철학자의 결론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의존해서 살면되는가? 예술가들이 멋진 조각이라고 말하면 나는 그게 왜 그런지 몰라도 멋지다고 생각하고 살면되는가? 전자레인지를 쓰기위해 전자기학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철학에서 예술에서 뭔가를 얻고 싶다면 누군가의 최종결론을 그냥 외우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된다. 그렇다고 할 때 이 복잡한 세상에서 삶은 어떻게 되는가. 공부할 것이 너무 많아서 삶을 살 시간이 없는 것같다. 그런데도 공부 없는 삶은 무의미한 짐승의 삶이나 마찬가지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과학적 관점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가운데 우리는 그런 관점에 익숙해져 가는데 삶은 인문학적 대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살아야 한다. 누구나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한다. 핵무기를 만드는 법이나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지식은 몰라도 살 수 있겠지만 과학도 인문학도 모르는채 현대 사회를 살 때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밀려갈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근거없는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면서 나중에 후회할 일만 하게되지 않을까? 지치고 피곤한 나머지 친절해 보이는 사람을 따라가서 사이비종교를 믿게 되지 않을까? 이런 어려운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걸 고민도 안한다. 그렇다고 할 때 생각해 보자. 우리의 지금 상태는 어떨까? 어설프게 남을 따라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말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거 아닐까?
나로서는 이 문제에 접근하는 가장 쉬운 길은 과학이 어떤 한계를 가졌는가를 합리적 판단이라는 차원에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과학 자체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기 보다는 포크레인으로 팬케익 자르기를 시도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특정한 상황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모든 상황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과학과 인문학을 하나의 연속체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우선 현대 과학이란 언제나 우리에게 당연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로 부터 출발하자. 역사적으로는 과학의 시대의 이전도 있었고 심지어 그 이후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시대들을 각각 신의 시대와 망의 시대로 부른다.
먼저 신의 시대를 보자. 이것은 갈릴레오와 뉴튼의 시대 이전을 말한다. 우리는 이 과학 이전의 시대를 단순히 미개한 시대로만 판단할 수도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옳은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그리 공평한 말은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정보를 구하고 축적하는 일이 어려운 시기에 가장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이었을까하는 질문의 차원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아야 한다.
대상을 관찰하고 법칙이나 질서를 발견한다는 귀납법적 사고 방식은 기본적 가정들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그런 질서를 발견할 수 있을 만큼의 데이터가 있다는 것 그리고 데이터 안에 어떤 질서가 있다면 우리가 그걸 발견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제 아무리 천재라도 아무 근거나 힌트도 없는데 올바른 법칙을 찾아 낼 수는 없다. 반면에 사람에게는 명백하게 질서와 법칙이 보이는 관찰결과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개나 개미같은 동물이나 곤충에게 준다면 그들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의 성공은 데이터를 축적하고 분석하는 일이 발전한 것에 기인한다. 즉 인쇄술이 보편화되고 수학이 발달하고 기술과 교통이 발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관찰하면 그것이 빠르게 기록되고 배포되고 다시 분석되었다. 이때문에 우리는 자연과 사회의 법칙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비로소 우리가 아는 과학적 사고가 생산적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을 때 즉 문자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지 못하고 대중의 교육수준이 형편없었던 시절에는 어땠을까? 그럴 때는 사람들의 말은 신용하기 어려웠고 그나마도 방대하게 자료가 모아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는 전통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오히려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내려온 전통이란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근거가 부족한 미신이거나 시대에 뒤진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고 해도 나름대로 삶의 경험이 적응을 통해 축적된 결과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잘못된 믿음을 가진 그 집단은 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랜간 살아남은 사회의 사회적 구조와 상식은 가능한 유일한 시스템은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검증된 시스템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지혜의 집대성을 무시하고 어설픈 과학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숟가락으로 댐을 건설하겠다는 말과 같아서 오히려 더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과학의 초기에는 내 눈과 전통중에 어느 쪽을 의심해야 할 것인가하고 묻는다면 그런 시대에 의심할 것은 내 눈쪽이었다. 그것은 대안을 제시하는 창조적 혁명이 되지 못하고 그저 무책임한 파괴였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무지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학적 관점은 아직 합리적인 것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부족한 데이터를 가지고 도출한 결론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들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당대의 시각으로 보면 그들의 주장은 의심스러운 것이 많을 수 밖에 없었고 그리 생산적이지도 않았다. 긴 수학계산은 계산하겠다는 의도가 옳아도 단 한번의 실수로 엉뚱한 답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계산했다라는 것이 옳은 답을 준다는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계산이 믿을 만한 환경인가 하는 것이다. 과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과거에는 그랬다. 콜럼버스가 미대륙에 도달했다고 해서 그의 계산이 엄청나게 틀렸었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초기의 과학자들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엄청나게 많았다. 지구가 돈다는 데 왜 멀미가 안나는가 같은 질문이 그랬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 시대에 지구가 돈다는 것을 왜 꼭 믿어야 했겠는가?
과학이 먼저 크게 성공한 분야는 데이터를 얻기 쉽고 분석하기도 쉬운 분야였다. 예를 들어 뉴튼의 중력 법칙은 우주 전체에서 같은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질량에만 의존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비교적 쉽게 데이터를 얻을 수 있고 그 데이터는 저차원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귀납법은 아무리 많은 관찰 데이터가 있어도 그 결론을 100% 확실하게 보증하지 않는다. 한 때 우리가 고전역학을 확실한 법칙으로 믿었지만 그것이 상대성이론으로 대체되었어야만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걸 말해주는 가장 유명한 예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래도 관찰데이터가 많고 그것이 저차원적인 특징을 가졌을 때 우리는 주어진 데이터를 지배하는 간략한 법칙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이 지난 몇백년동안 그렇게 성공적이었던 이유다. 하지만 주어진 데이터가 더 많은 것들에 의존하는 고차원적인 성질을 가지게 되면 데이터에서 법칙을 발견하는 문제는 기하급수적으로 더 어려워진다. 데이터도 엄청나게 더 많이 필요해진다.
데이터를 얻기 힘들고 그 데이터가 또한 매우 고차원적인 경우의 좋은 예는 뇌다. 사람의 뇌는 천억개나 되는 신경세포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신경세포들이 모두 다 다르다. 게다가 수없이 많은 종류의 세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집단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뇌가 어떻게 행동해서 인간의 의식을 만들어 내는가에 대해 현대의 엄청난 기술로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뇌과학은 뉴튼같은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고 배출할 수 있을까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비슷한 이유로 우리는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이해 혹은 삶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 실패하고 있다.
데이터 자체가 매우 구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과학적 사고 방식은 이 세상에 단 한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별 소용이 안된다. 과학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에 대해 큰 도움이 안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복잡하기도 하기 때문이지만 우리가 각각 모두 독특하고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론 언제나 우리를 다수 중의 하나로 파악해서 나름대로 우리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 중의 하나로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있으며 거기에서 인간들의 삶이 가지는 공통된 혹은 평균된 특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것도 나름 중요할 수 있다. 더 테두리를 넓혀서 우리가 우리를 포함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점을 생각해 본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측면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뭔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큰 틀의 사고는 대한민국의 전라도 전주시 완산구에서 사는 특정인에게는 그저 두리뭉술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는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사는가를 기준으로 고작 몇명을 가능한 예로 생각하여 삶이란 어떤 것일까를 추론하려고 하면 그것은 근거가 매우 빈약한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 되고 만다. 즉 우리를 이야기하는 테두리를 넓히면 구체성이 떨어지고 그걸 좁히면 우리 이해의 신뢰성이 크게 떨어진다. 데이터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의 이러한 측면을 통해서 과학과 인문학이 가지는 다른 역할을 이해하게 된다. 과학은 객관성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고 많은 데이터가 존재하는 주제에 대해 유용한 이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런 전제가 무너지는 영역에 가면 우리는 다시 전통의 지혜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직관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즉 보편성으로만 나가기 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지금의 사고와 생활방식에 도달하게 되었는가하는 우리의 역사와 그리고 세계를 보는 나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하는 우리의 현재 모습에 대한 고민이 더 핵심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절대적 객관성을 추구할 수 없다. 중력의 법칙은 모든 물질에 통하는 것이지만 가장 감동적인 노래도 짐승들에게는 소음일 뿐이다. 문화권이 다르면 우리의 최고의 노래가 저쪽 사람에게는 별다른 음악이 아닐 수 있다. 추억이 있는 음악은 나에게 아주 의미가 깊지만 나빼고 모든 다른 사람에게는 지겨운 음악 이상이 아닐 수도 있다.
인문학의 영역에서는 어떤 기본적 원리에서 논리적으로 모든 것을 연역하는 식으로 설명을 만들어 낼 수없다. 그런 이해는 불가능하다. 이 분야에서 중요한 문제는 선택과 인식의 문제다. 즉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주목할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역사에 있어서 절대적인 의미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의 관심을 기반으로 과거를 보고 특정한 것에 주목하여 역사를 재창조해낸다. 다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과거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므로 과거의 역사적 인식과의 연속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내일의 나는 오늘까지의 나를 재해석하여 조금 바꾼 것이다. 그 비약이 너무 클 때 그것은 자기 파괴가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인문학이 인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법칙의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과학도 단순히 관찰된 데이터에서 법칙을 찾는 일은 아니다. 과학에도 무엇을 어떻게 주목할까의 문제는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는 과학의 객관성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양자역학의 개척자인 하이젠베르크가 그의 업적중 하나인 불확정성원리를 발견했을 때 그는 그가 과거에 아인쉬타인과 나눴던 대화에서 착상을 얻었다. 아인쉬타인이 했었다는 그 말이란 바로 “이론이 비로소 사람이 뭘 볼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는 말이었다. 측정과 관찰은 그 대상을 요구하는데 그에 필요한 개념들은 그 자체가 우리가 가진 이론의 일부다. 양자역학의 발전 속에서 이 교훈은 매우 분명한 것이 되었다. 과학역시도 우리 자신을 없애고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정리해 보자면 우리는 인문학이건 과학이건 주어진 환경속에서 합리적 입장이란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런 입장에서 비로소 모든 학문들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합리적인 것인가를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 과학적 접근만이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고 세상에는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과 인문학은 데이터와 분석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합리성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융합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제까지의 문맥위에서 과학의 시대 이후의 시대인 망의 시대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하고 정리하도록 하자.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데이터의 폭발이다. 신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 혹은 인문학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가 갈라지는 것은 데이터가 얼마나 존재하며 그것을 얼마나 잘 분석할 수 있는가 에 달린 것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상은 또한번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망의 시대는 우리가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구할 수 있는 시대다. 데이터의 기록과 저장, 분석이 발전된 기계의 힘으로 이뤄진다. 이 시대가 망의 시대인 것은 데이터가 망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은 고차원의 데이터 속에서 그 안에 존재하는 질서를 찾아내는 일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최근 인공지능의 발달에서 보여지듯이 우리는 이제 기계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시대를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엄밀한 수학의 발달이 단순한 머릿속 사고로만 찾아내기 힘든 법칙을 찾는 것을 도와준 사건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원리적으로 인공지능이 찾아낸 법칙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 혹은 이해를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던 학문이고 이해다. 그것은 마치 개미가 기계의 도움을 받아서 핵폭탄을 만들 수 있게 되는 시대와 같다. 개미는 혼자서 결코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추상적 개념을 소화할 수 있는 두뇌를 개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타고나기는 침팬지와 그리 다르지 않았던 인간이 문자를 쓰기 시작한 이후부터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듯이 이제 컴퓨터가 인간의 정신을 완전히 새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시대는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과도기에 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글의 문맥속에서는 이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과학의 시대에 인문학이 겪었던 일을 이제 기존의 모든 학문이 겪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생각해 볼만하다.
이것은 새로운 학문의 방식이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인공지능으로 하여금 분석하게 하고 그 안에서 법칙이나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다. 컴퓨터를 통한 수학공식의 증명은 이제까지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가 우리를 위해 온갖 종류의 수학공식을 찾아주기까지 하는 시대는 그전과는 다를 것이다.
이런 시대의 과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를 보여주는 한가지 예는 오래된 과학적 난제였던 단백질 접기 문제를 인공지능이 실질적으로 해결한 사건이다. 알파고가 인간보다 바둑을 잘 둬도 인간이 어떻게를 이해하지 못하듯 이런 해결은 인간이 단백질 접기 문제를 전통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과학적 접근과 해결은 앞으로 점점 늘어갈 것이고 그것이 앞으로의 과학적 발전의 몸통을 이룰 가능성은 크다. 그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블랙박스 부분을 가진 과학적 진보다.
이런 시대에 인문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리고 에세이를 쓰는 일이 자꾸 화제가 되고 있다. 적어도 대부분의 철학 전공자보다 철학에 대해 더 잘 대답해주는 인공지능이 있다고 할 때 과연 철학적 담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인간은 문자 문화와 융합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러한 새로운 데이터 처리 방식과 융합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로 변할 것이다. 침팬지에게 자본주의나 민주주의가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말인 것처럼 미래의 인간의 사고는 현대의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복잡한 것일 것이다. 그 인간은 인공지능과 융합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도 삶은 계속 될 것이다.
이것은 인문학과 과학을 하나의 연속되고 융합된 행위로 바라보는 일을 더 중요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점점 더 쉽지 않은 일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현대 도시 안에 나타난 원시인처럼 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에 적응하지 못할 때 미래에는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것에 단순히 반대하는 행위는 비행기 조종석에서 난동을 부리는 침팬자의 행동처럼 여겨질 것이다. 정치적으로 사람들은 분열될 것이며 혁명은 여러 사람들을 괴롭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하고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 우리가 과학자나 예술가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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