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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집에 대한 생각

8년만에 집을 구하며

by 격암(강국진) 2023. 1. 4.

23.1.4

전주에 온지 8년. 이사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집을 보러 다니고 있다. 지금 나는 주인세대라고 부르는 집에 살고 있다. 이것은 원룸빌딩의 꼭대기층에 있는 복층 주거인데 좀 차이가 있지만 2층집을 건물 맨 위로 올려 놓았다고 보면 된다. 파라솔을 놓고 꽃과 채소를 키울 수 있는 테라스가 있으며 2층으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2층을 단지 창고로 쓰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주인세대를 잘 못지어서 그렇다. 잘지은 주인세대의 복층은 손님방이나 서재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다. 주인 세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예를 들어 보면 이렇다.

4층과 5층이 합쳐져서 주인세대다. 이 집은 테라스 공간이 아랫층에 없어서 아랫층은 사실 그냥 보통 아파트와 차이가 없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가면 5층 복층이 나오고 복층의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면 주인세대가 독점적으로 쓸 수 있는 테라스가 나온다. 

사실 주인세대의 복층을 신경쓰지 않고 지으면 단열이 부실하여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게다가 어떤 곳은 그 복층이 마감이 부실하고 냉난방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창고밖에는 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그런 주인세대도 많지만 8년만에 집을 구하면서 보니 점점 주인세대를 잘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누적되고 있는 것도 있고, 더 좋은 자재를 쓰는 면도 있는 것같다. 

주인세대에 8년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8년전에도 요즘에도 주인세대들을 둘러 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집은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아직 아쉬운 면도 있다. 먼저 계단에 대해 말해보자. 주인 세대는 복층이 핵심이다. 복층이 빠지면 그냥 보통 빌라나 아파트와 같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두 층이 생기면 계단이 있어야 물건과 사람이 오고갈 수 있는데 이걸 설계를 잘못하는 경우가 참 많다. 위에서 보여준 집은 성공적인 경우다. 통로로 쓸 계단은 예쁘지만 잘 감춰져 있다. 게다가 물건이 오고갈 수 있는 계단이 옆쪽으로 따로 또 있다. 어떤 집은 부엌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윗층으로 가는 좁다란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은 자연히 매우 좁고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다. 그러니까 이 계단이 어디에 어떤 형식으로 있는가 하는 것이 주인세대의 만족감에 큰 영향을 준다. 

복층은 법규상 지붕이 편평할 수 없다. 그러면 건평에 포함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의 사진처럼 지붕이 중앙이 높고 옆으로 가면 떨어지는데 이는 설계상의 제약을 가져오게 되고 다시한번 좋은 주인세대와 나쁜 주인세대를 구분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제대로 지은 주인세대의 복층은 쓸모 있는 생활공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짐들을 치워버릴 수납공간을 많이 제공한다. 위의 사진에서 보여준 집에서도 옥탑끝쪽의 벽면은 사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문을 열면 물건을 넣어둘 수 있는 공간을 주게 되어 있다. 어디에 살건 살아보면 아주 중요한 것이 수납이다.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치워버려서 마치 물건이 별로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 사치스러운 것이다. 즉 빈공간이야 말로 가장 소중한 인테리어다.

주인세대는 이런 공간적인 면에서 경쟁력이 있고 잘 설계하면 여기저기 짐을 치워둘 공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 물론 비싼 집이 더 큰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다. 하지만 같은 가격대라고 한다면 단독 주택, 아파트, 주인세대중 실내 공간은 주인세대가 가장 크고 단독주택이 가장 작다. 단독주택이 가장 작은 것은 같은 가격대이기 때문이다. 아파트나 주인세대와 견줄정도의 단독주텍은 결국 협소주택에 가깝게 작고 겉으로보면 멋지지만 들어가보면 정말 작다. 이번에 그런 집에 몇군데 가보았는데 빈집을 본다면 너무 멋졌겠지만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짐들이 모든 것을 뒤덮고 있어서 사는 모습이 엉망이었다. 두번째는 아파트다. 요즘은 4베이라고 해서 베란다 공간을 크게 잡고 그 베란다를 확장해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옛날 아파트보다 요즘 아파트가 더 크며 식구수가 줄어듬에 따라 펜트리나 드레스룸같은 수납공간을 많이 만드는 것이 요즘과 옛날 아파트의 차이다. 주인세대는 앞의 두 경우보다 더 크다. 다만 역사가 길지 않기 때문인지 저렴하게 지으려고 하기 때문인지 단독주택이나 아파트보다 부실하게 지은 곳도 많다. 아파트처럼 전국 어디나 있지도 않다. 요즘은 엘리베이터를 다는 집이 많지만 없는 곳도 많다. 다만 이것은 4층정도이기 때문에 살아보니 그게 말도 안되는 선택은 아니다. 

집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집의 표준이다. 집은 어떻게 생겨야 하고 집에는 뭐가 있어야 할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표준을 가지고 있을까? 위에서 말한 계단의 위치같은 것에 대한 아이디어도 훗날에는 그 표준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누구나 장농이라고 하는 큰 옷장을 사고 이사를 갈 때면 그걸 분해하고 가서 다시 조립하는 일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요즘 짓는 집들은 수납장, 드레스룸, 펜트리등 수납을 위한 공간을 많이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장농은 거의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래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즉 제대로 된 집이라면 장농따위는 살필요가 없어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집의 표준에는 수납공간이 있어야 한다. 거기들어가 가는 세입자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게 아니라 말이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수납장보다도 대중적이지 않은 것은 또 있다. 그건 시스템 에어컨이다. 건물을 지을 때 아예 시스템 에어컨을 설치해서 지으면 공간활용도 좋고 미관적으로도 훌룡하다. 위에서 보여준 주인세대도 시스템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 경우다. 한국에서 선풍기만으로 여름을 나는 사람은 이제 소수다. 그러니 사람들은 어차피 에어컨이 필요하다. 그런데 집을 지을 때 그걸 설치하지 않으니까 에어컨이 공간을 차지한다던가 미관적으로 나쁘다던가 하는 문제 말고도 비용이 골치 아프다. 에어컨은 비싼 것인데 그걸 샀다가 다음에 이사갈 집에 에어컨이 있으면 어쩔 것인가? 게다가 에어컨은 선풍기처럼 그냥 들고 갈 수 있는게 아니다. 떼는데 돈이 들고 붙이는데 돈이 든다. 이건 '장농 상황'이다. 즉 한국집의 표준에는 에어컨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에어컨을 사고, 그걸 붙였다 떼었다하면서 이사다닐 필요가 없어야 한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그건 커튼내지 블라인드다. 누구나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집을 짓는 사람들은 마치 그런 건 내 알바 아니라는 듯이 집을 짓는 것같다. 물론 커튼이나 블라인드는 개인 취향도 있으니까 미리 설치해놓는 것이 안좋을 수도 있지만 사실 전문가가 개입하여 잘 선택해 준다면 집에 대해 노하우가 작은 사람들이 그걸 설치하려고 고민하는 것보다 더 좋을 수도 있다. 집을 설계하는 사람이 블라인드도 그 설계에 포함시킨다면 아주 멋진 게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블라인드나 커튼을 세입자가 선택하여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걸 설치할 장소를 명확히 해놓은 곳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멋진 새집인데 블라인드를 달자고 하면 어딘가 미심쩍은 곳에 나사를 박거나 못을 박아야 하고 어떤 때는 심지어 그게 콘크리트 못이어야 할 때도 있다.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마치기 위해 한가지만 더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공간의 활용에 대해 고민하고 지은 집은 티가 난다. 그런데 그런 집은 아직도 거의 없다. 공간활용에 대한 기본적 배려중의 하나는 방의 크기가 1인용 침대가 들어갈 정도의 길이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방을 손님방으로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식은 이제 거의 다 지켜지고 있다. 하지만 대개는 거실이건 안방이건 작은 방이건 공간을 고민없이 잘라 놓아서 식탁이 어디가야 한다는 건지, 침대를 놓았을 때 발치앞에 공간이 애매하게 남으면 그걸 어떻게 써야 한다는 건지, 창틀이 유용하게 쓰이려면 적당한 높이를 가지면 좋은데 그걸 무시했다던가 하는 일이 많다. 

가구를 배치하는 것은 집을 완성하는 일이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해 완벽하게 지은 집은 가구 배치에 고민할 것이 없으면서도 자유도가 많아서 재미있다는 뜻이다. 이리저리 가구를 바꾸면 새집이 된다. 나쁜 집은 아무리 고민해도 빈집일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가구 몇개 가져다 놓으면 집이 그냥 너저분하고 생각보다 가구를 놓을 공간이 없으며 그나마도 상상력을 펼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공간을 대충 잘랐기 때문이다. 

집을 짓는 일은 가장 사치스러운 일이며 힘든 일이라 내가 감히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사철이 되어서 이런 저런 집들을 보다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한국의 주거문화, 생활문화는 이제 시작이다. 꼭 비싼 집이라서 더 잘사는게 아니라 생활과 집의 표준에 대한 고민이 지금보다 더 많이 누적되어야 할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8년간의 주인세대 거주가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다른 곳을 둘러보니 마음이 가지 않는다. 아마 나와 같은 사람도 세상에는 꽤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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