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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용서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26. 3. 16.

용서(容恕)란 한자말로 본래 받아들이다라는 뜻의 용(容)과 헤아리다라는 뜻의 서(恕)가 만나서 남의 마음을 헤아려서 받아들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의 영어번역으로 말해지는 forgiveness는 이와는 좀 달라서 이것은 남이 가진 부채를 탕감해주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본래는 상당히 경제적인 뜻이었던 셈이다.

 

용서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다 같지는 않겠지만 나는 주변의 사람들이 서양식의 의미로 용서를 말하는 것을 종종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잘못된 말을 했거나, 행동을 했다고 할 때 그걸 용서하라는 말은 그런 과거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라는 뜻으로 통상 여겨지는 것이다. 마치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바람직한지 심지어 가능하지조차 의문이며 한자로 말해지는 용서의 뜻을 생각해 보면 이는 용서의 뜻과는 오히려 반대가 되는 것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헤아려서 받아들인다는 용서는 결코 과거에 있던 일을 없던 일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헤아린다는 것은 사실 잘 본다는 뜻이다. 잘 보는 것이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선택적으로 사실을 모아서 뭔가를 이해하는 것일까? 여기 어떤 어린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 아이는 철이 없어서 칼을 들고 찌르면 상대방이 아프고 상처입는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한번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그 아이를 용서할 수 있다. 그 아이는 자신의 행동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 아이가 칼을 잡았을 때 그 주변에 가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잊는 것일까? 철없는 아이보다 더 극명한 사례로 가자면 우리는 손을 대면 내 손을 무는 모기나 개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개미가 내 손을 무는데 그걸 용서한다는 뜻이 과연 그런 일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듯이 계속 개미굴에 내 손을 집어넣는 것일까?

 

이러한 사례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저 받아들인다는 뜻의 용서는 나쁜 말이거나 매우 안정된 사회에서나 가능한 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덜컹 덜컹 거리는 만원 버스안에서 이따금 사람들이 흔들려서 서로에게 가볍게 부딪힐 때 우리는 상황을 이해하고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참고 버스를 탈 수 있다. 왜냐면 흔들려서 서로에게 부딪히는 것은 누구의 악의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일일 뿐더러 그저 가볍게 부딪힌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작은 일이다. 작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무시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주유소에서 불장난을 하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 저런 장난도 때로 칠 수 있다면서 웃고 용서하면서 그 주유소에서 계속 기름을 넣는 것도 용서하는 마음일까? 특히 그 불장난을 계속 하는 사람, 심지어 가끔 불을 내서 사람도 죽이는 사람이 용서하라고 한다면 그게 용서라는 말의 정말 정당한 뜻일까? 주유소의 불장난은 심각한 일이다. 큰 일이다. 이런 크고 작은 일의 구분없이 그저 있는 일을 무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이건 꼭 상상속의 일이 아니다. 나는 흔히 학폭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장난으로 여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학폭 피해자들은 어떤 사과로도 치유되지 못할 정도의 피해를 입는데도 학폭 가해자들은 그까짓거 통크게 악수 한번 하고 나면 웃어넘길 수 있는 장난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학폭가해자는 쉽사리 용서를 말하고, 심지어 용서를 해주지 않는 학폭피해자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용서가 이런 말이라면 그건 나쁜 말이 아닌가?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이나 폭언을 일삼는 사람이 용서를 입에 담을 때 뭐 그런 걸 구질구질하게 마음에 담냐면서 없던 일로 하라는 사람은 정말 제대로된 용서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그런 태도는 세상에 존재하는 비극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위선적인 태도가 아닐까?

 

널리 헤아려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을 잊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사실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의 의미는 그것이 어떤 문맥에 놓여졌는가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굶주려서 빵을 훔친 자를 무조건 욕할 수 만은 없다.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그것이 어떤 문맥에서 이뤄졌는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목숨은 크고 빵은 작다. 우리는 어쩌면 그 사람이 굶주리는 사회적 구조를 생각하면서 모두의 책임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면서 더 크게 보려고 하고 있다.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지 않는 용서란 바보짓이다. 누군가가 내 발을 밟았는데 이유가 있겠지라고만 생각할 뿐 이유도 모르면서 참는건 똑똑한 것도 관대한 것도 아니고 그냥 바보짓이다.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헤아리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생각없이 말하고 행동하면서 흔히 자신을 솔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저런 생각만 할 뿐 솔직한 마음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위선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주변을 헤아리면서 살 것을 권하는 사람을 앞에서 말한 바보처럼 행동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들은 바보의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을 구분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을 헤아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돈을 잘 벌면 그 사람을 비난한다. 왜냐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주변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란 바보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누가 발을 밟아도, 그 사람집에서 도둑질을 해도 다 웃고 용서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주변을 헤아리라는 사람이 부자라면 그 사람은 위선자라는 뜻이다. 용서를 잘하는 사람은 거지가 되야 맞다. 도둑질한 사람들을 다 용서해 줬을테니까, 남의 일을 내일처럼 생각해서 가진 걸 전부 나눠주었을 테니까 말이다. 때로는 그 어리석은 사람들은 스스로 그 사례깊은 사람을 모욕하거나 도둑질을 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넌 이래도 되는 사람이라며? 넌 용서하는 사람이라면서? 이건 줄을 서자는 사람을 마구 새치기를 하면서 바보취급하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해 보면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분하는 사람이 왜 꼭 가난할 것인가? 굳이 따지자면 큰 부자일 가능성이 높다. 부자란게 전부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만 있는 마을이 아니라면 말이다.

 

용서를 잘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내 발을 밟으면 그걸 잊는 사람이 아니다. 잘 헤아린다는 것은 오히려 뭐 하나 잊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행동을 통해 자신이 고양이나 개라는 사실을 밝힌 사람이 그 이후에 무슨 일을 하건 그 사람이 개나 고양이라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벌어진 일이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잘 헤아린다는 것은 사실을 잊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보는 것에 대한 것이다. 잘 헤아린다는 것은 오늘은 비록 내가 불의의 일격을 당하는 일이 있었지만 다음에는 되도록이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로 용서란 아무리 사과해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달콤한 몇마디의 말이 몇십마디의 말이 된다고 해서 고양이가 사람이 되고 이미 일어난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성인군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걸 흉내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바보짓이다.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해도 어떤 사람의 마음은 상처입지만 어떤 사람의 마음은 전혀 상처입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고 이해하고 보는 것은 서로 다르다. 외모보다 훨씬 귀중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못생겼다고 말해도 그렇냐면서 껄껄 웃고 말 것이다. 그런 말은 그 사람을 상처주지 못한다. 그 사람은 따로 추구하는 더 큰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외부에서 보면 무례한 행동을 웃어넘기는 그런 행동은 용서하는 행동같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그것은 사실이다. 그 사람은 잘 살피고 헤아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자신의 진짜 일에 큰 영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문맥에 따라서 진심으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속으로 상처입었으면서 훌룡한 사람은 주변 사람의 무례를 쉽게 용서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건 바보다. 그건 용서가 아니다. 겉으로는 똑같이 행동했지만 사실은 내부적으로 전혀 다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되는게 아니다.

 

우리는 단편적인 행동 하나를 따라해서 뭘 얻게 되지 않는다. 하나의 행동은 거대한 삶의 연속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걸 무시하면 무한히 어딘가에 도달하고 싶어서 노력하는데 정작 내부적으로는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된다. 잘 헤아리고 넓게 본다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고 내적인 것이다. 설사 그것이 전체 삶속에서 드러난다고 해도 단편적인 하나의 행동이 그것을 나타낼 수는 없다. 용서하는 사람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내가 뭘 보고 뭘 헤아리고 있으며 뭘 크게 생각하고 뭘 작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건 생각하지 않으면서 용서하는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론 머스크같은 부자가 1억을 쓰는 걸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전재산이 1억도 안되는 사람이 1억을 우습게 여기는 것과 같다. 바보짓을 하다가 망하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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