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11
한국의 사회문제에서 가치와 철학의 문제는 이제 회피할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그 문제를 바라보는 방법중의 하나는 바로 박정희-전두환 대 김대중-노무현의 대비를 통해서이다.
많은 한국 국민들이 가치관과 윤리에 있어서 박정희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대표하는 가치란 무엇일까?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흔히 꼽는 것은 청렴, 근면, 의리, 소신 이런 것이다. 박정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박정희는 실은 공산주의자이면서 공산주의자들을 밀고한 사람이며 박정희가 청렴결백했다면서 박근혜가 지배하는 엄청난 장학재단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박정희의 지지자들은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로 존재했던 박정희를 비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는 그와는 별개의 문제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상속에 존재하는 박정희라는 인간에 대한 존경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청렴, 근면, 의리, 소신의 인간이면 완벽한 것인가? 그들은 어떤 인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이같은 생각은 먼저 이 같은 덕목이 어딘가에서 듣던 무언가와 비슷하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실은 이같은 덕목은 바로 이상화된 사무라이의 덕목이며 일본인들의 이상향인 것이다. 일본의 육사출신인 박정희는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도 인정받는다고 들었다. 그들의 덕목을 실천했다고 말하지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집권후 박정희식 사고 방식의 아류로 편입했다. 장세동이 전두환에게 의리를 지키더라라는 일화는 대의야 어찌되건 주군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전두환은 이 경우 쇼군으로 권위주의로 나라를 지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다른 인간도 있다는 것인가? 물론 있다. 이제 김대중 대통령-노무현 대통령을 보자. 이들이 대표하는 가치는 -물론 이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건 박정희 대통령의 덕목이 그 반대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합리주의다.
공사를 구분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고 법치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들이 대표하는 가치다. 다만 시대적 차이로 인해 차이가 나타나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한 보스였으나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지 않았다는 차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후계자가 노무현 대통령이 된 이유는 대중에게 그 자격적 조건은 파벌의 수장인 것이 아니라 합리주의였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한데 비해 박정희는 독재자로 기억되는 것에는 서구가 합리주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에 있어서 육체로 존재한 박정희와 이상화된 박정희가 다를 수 있듯이 현실의 김대중-노무현은 이상화된 김대중-노무현과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존재하다고 해서 이상화된 인간형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국민들은 하나씩들으면 다 좋은 말이지만 현실에서 서로 상충하는 면이 있는 가치들을 어느 정도 선택하거나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서 국민들은 뭘 배웠을까? 박정희식 인물관의 한계를 우선 들 수가 있다. 결국 그건 왕조다.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박정희의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으며 법과 논리와 공사의 구분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것은 전두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김대중-노무현시대에서 국민들이 느낀 것은 현실과 이론 사이의 차이와 그 한계다. 현실속의 한국인들은 권위에 잘 굴복하는 사람들이 있고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 앞에서 민주정부는 무력하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이때문에 강력한, 거의 독재적인 개혁의 추진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들에게 실망하고 마는데 실은 그들이 원했던 것은 김대중-노무현이 아니고 그들의 편에 선 박정희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지지를 했다고 할 수가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가운데 선택된 것이 입만열면 실용을 외치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실용주의는 훌룡한 철학일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실제로 실용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하는가? 실용이나 중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에 대해 감수성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실용은 배금주의가 되고 중용은 기회주의가 된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사람들은 이점에서 착시를 일으켰다.
우리는 물론 역사를 논하면서 육체로 존재한 인물들을 정확히 봐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각시대의 국민들이 그들을 통해 본, 혹은 보고 싶어하던 가치와 문화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국민의 뜻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이 가치는 육체로 존재한 인물들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가 있다. 이런 점을 자각할 때 우리는 진정한 과거의 극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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